이탈리아의 지역감정은 한국보다 심한데 여기에 축구까지 결부가 되면 휘발성이 더 강해진다.
이탈리아 세리에A에는 여러 라이벌리가 있는데 지금도 유지되고, 악감정이 쌓여있는 두 팀이 있다.
피렌체를 연고로 둔 피오렌티나 vs 토리노를 연고로 둔 유벤투스
몇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 두 팀의 사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진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있다.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보자.
1989,90시즌이 끝난 뒤
피오렌티나는 팀의 떠오르는 에이스였던 로베르토 바조를
유벤투스에 월드 레코드를 경신해 한화 약 128억원에 팔아버린다.
이는 선수인 바조와 의논하지 않고 양 팀 구단 차원에서 이뤄진 이적 협상이었고
느닷없이 팀을 옮기게 된 바조는 벙쪄서 안 간다고 버텼고,
유벤투스로 안 가겠다고 유력 신문과 인터뷰까지 한다.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 거리에 시민들이 몰려 나왔고
구호를 외치며 시작된 시위가 격화되자 경찰이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50명이 다치고
주동자 6명이 체포된다.
이 때 시위대가 내 건 표어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폰텔로(당시 피오렌티나 구단주)는 유벤투스로
바조는 우리와 함께"
사실 이 때 피오렌티나 재정은 바조를 비싸게 팔지 않으면 구단 운영이 지장을 받을 만큼 어려웠고,
바조는 피오렌티나 팬들이 저렇게 반대하는데 차라리 자신을 인터밀란으로 보내달라고 말했으나 어쩔 수 없이 계약대로 유베로 옮긴다.
유벤투스 구단주 쟌니 아녤리는 플라티니의 후계자인 새로운 에이스를 데려오는데 잡음나는게 싫었던지라
바조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계약 외에 별장 한 채와 페라리 스포츠카를 한 대 더 준다.
어쨌든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비안코네리 옷을 입게 된 바조는
다음 시즌 피렌체로 첫 원정경기를 간다.
이날따라 유베로 떠난 바조 이놈스키를 보겠다며 경기장은 초만원.
경기장에 입장할 때부터 바조는
둥가 등 피오렌티나 시절의 동료들과 포옹하는 등 피렌체를 떠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기가 거칠어지면서 유베가 페널트킥을 얻었는데,
페널트킥 전담 키커로 정해진 로비가 이를 거부한다.
표면적으로는 피오렌티나 골키퍼가 자신의 버릇과 페널트킥 방향을 안다는 이유였는데,
아마 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조 대신 페널트킥을 찬 데 아고스티니의 킥이 피오렌티나 골키퍼에게 막히고 만다.
결국 유베의 당시 마이프레디 감독이 바조를 교체한 뒤,
벤치에 앉히지 않고, 먼저 내려보낸다.
로비가 걸어가는 길에 피오렌티나의 일부 팬은 야유하고 일부는 뭘 집어던지는 와중에,
누군가가 피오렌티나 스카프를 바조에게 던졌고,
로비가 그걸 소중하게 받아들자
피오렌티나 관중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결국 경기는 피오렌티나가 1:0으로 승리했고
로비는 이 때문에 유베의 새 동료들과 팬들에게 조금 찍힌채로 토리노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지금 열거한 내용이 종합적으로 나와있는 동영상
로비는 언젠가 말했다.
"나의 심장은 보라색(피오렌티나의 상징색)이다"라고.
그렇게 바조는 피오렌티나와 아름다운 결별을 했지만
이후에도 피오렌티나와 유벤투스는 비슷한 스카우트가 몇 번 더 반복되는 등
양쪽팀 팬들 사이에 앙금이 남았고,
그래서 지금도 세리에A의 피오렌티나 vs 유벤투스의 경기를 '바조 더비'라 부른다.
한편 바조는 피오렌티나에서 달랑 2시즌만 같이 뛴 보르고노보 선수가 훗날에 병을 얻어 쓰러지자
선수 은퇴한지 꽤 되었음에도 그를 위해 피오렌티나 홈구장에서 자선경기를 마련해 자신이 직접 옛동료의 휠체어를 밀어주었으며,
보르고노보 가족들이 재단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등 옛동료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
보르고노보의 자서전 발표 행사에 모인 동료들 - 바조, 바레시, 말디니, 리피 감독 등
보르고노보 선수는 자선경기가 있은 후 1년 뒤에 눈을 감았다.
브라질의 로마리오(훗날 발음 표기법 변화로 호마리우)와 이탈리아의 바조.
1994원드컵 결승전은 내 인생 최고의 결승전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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