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23분.
광복절 29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던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고 있었다.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 방법으로 이룩돼야 한다…."
바로 그때.
"탕…. 탕, 탕탕, 탕탕탕."
갑자기 총격전이 벌어지고 식장은 수라장이 됐다.
단상 의자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다.
저격수 문세광은 곧바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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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기]
| 편집 | ◆ 현장 상황
문세광은 이날 오전 8시쯤 조선호텔을 나와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검문을 수월히 피하기 위해 미리 포드 20M 검은색 승용차를 빌려놓았다. 극장 입구를 무사히 통과한 문세광은 식장 입구에서 한 차례 검문을 받았지만 일본어를 사용하며 귀빈 행세를 해 식장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기념식이 시작되고 얼마 뒤. 왼쪽 열 맨 뒷좌석(B열 214번)에 앉아 있던 문세광은 준비해간 38구경 스미스 앤드 웨슨 리볼버 권총을 꺼내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첫 번째 총탄은 자신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직후 문세광은 다리를 끌며 통로를 따라 곧장 연단으로 접근했다. "탕" 두 번째 총알이 박 대통령이 서 있던 연단 왼쪽에 박혔다. 박 대통령은 즉각 자세를 낮춰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세 번째는 불발탄.
그리고 네 번째 총알이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 여사의 머리 오른쪽에 명중했다. 한 참석자가 문세광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지만 문세광은 비틀거리며 또 한발을 발사했다. 이 총탄은 연단 뒤 태극기에 박혔다. 불과 5~6초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때야 좌석 앞쪽에 앉아 있던 경찰관들이 문세광의 머리를 권총 손잡이로 내려친 뒤 이중삼중으로 덮쳤다.
육 여사는 곧장 앰뷸런스에 실려 인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돼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오후 7시 결국 숨을 거뒀다.
문세광은 재판에 회부돼 1~3심에서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사건 발생 127일 만인 그해 12월 2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편집 | ◆ 남는 의문점
그간 제기된 가장 큰 의문점은 "과연 문세광이 쏜 총알이 육 여사를 명중시켰나"였다.
의혹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당시 현장 비디오 등을 판독해보면 문세광이 쏜 다섯발 중 한발은 연단 위 천장을 맞혔다"고 주장한다. 허벅지.연단.태극기로 향한 3발과 불발탄을 제외하면 남는 건 한발. 그 한발이 천장을 맞혔다면 육 여사를 쏜 총알은 어디에서 발사됐느냐는 것이다.
당시 현장에선 모두 7발이 발사됐다. 두발이 더 있는 것이다.
그중 한발은 경호원이 문세광을 겨냥해 쏜 것으로 빗나가 D열 합창단원석에 앉아 있던 여고생을 맞혔다. 그래서 나머지 한발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으나 최종 수사결론은 '문세광의 네 번째 총알'이 육 여사를 숨지게 한 것으로 내려졌다.
당시 수사 당국 주변에서는 한동안 '제3의 저격수'가 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나돌기도 했고, 조총련 등에서는 '음모설'을 유포하기도 했다.
문세광이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비표도 없이 검문을 무사 통과한 점,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권총을 숨겨왔다면서도 전혀 적발되지 않은 점, 일본인 명의의 위조 여권으로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했다는 점 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됐었다.
| 편집 | ◆ 사건 일지
| 편집 | ◆ 이후...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의 영구차에 작별을 고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풍속에 따라 청와대에서 발인식만 올리는 것이 좋다"는 장례위원들의 건의에 따라 영결식장과 장지에는 가지 않았다.[중앙포토]
'북한 지령을 받은 조총련의 남한 공산화를 위한 조직적 대통령 암살 계획'.(한국 정부)
'공산주의에 빠진 한 재일 한국인의 단독 범행'.(일본 정부)
20일 공개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외교 문서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한.일 양국의 좁혀지지 않은 시각차를 드러낸다.
한국 정부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저격범 문세광(당시 23세)에 대한 수사 내용을 알려주며 공범 인도 등 일본의 협조를 요청했다. 일본은 한국의 수사 사항에 대해 조목조목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문이 배후 인물로 지목한 조총련 간부 김호룡(당시 46세)의 혐의를 부인하며 끝내 넘겨주지 않았다.
◆ 배후 인물= 한국 측 수사본부는 문이 1972년 9월 오사카에서 열린 민단.조총련 단합대회에서 처음 만난 김의 조종을 받아 범행했다고 밝혔다. 김은 "남한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면 먼저 대통령을 암살해 이를 인민봉기의 기폭제로 해야 한다"고 문을 선동하고 구체적으로 범행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통보받은 일본 측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는 '끽다점'(다방)에 관해서부터 상세히 묻는다. 74년 10월 양국 간 오간 수사내용 문서에 따르면 일본 측은 '점포 내 탁자의 배치 상황' '점원의 특징'까지 꼬치꼬치 물었다. 우리 측은 "7개 정도의 장방형 탁자가 카운터에 평행되게 놓여 있었다. 카운터 안에는 20세가량의 젊은 남자가 조리하고 있었고 카운터 밖에는 약 40세의 보통 키에 약간 둥근 얼굴을 하고 살이 찐 여자가 심부름을 하였는데 주인 같았다"고 답했다.
◆ 공범 관계= 한국 측 수사 결과에 따르면 두 명의 일본인이 당시 사건에 개입했다. 문의 위조여권 명의인인 요시이 유키오(당시 24세)와 그의 아내 요시이 미키코(당시 23세)다. 한국 수사진은 "문이 학창시절부터 알았던 공산주의자 미키코에게 대통령 암살 계획을 설명하고 73년 11월 남편 명의의 여권 발급 협조를 부탁했다. 남편에게도 설명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측은 "문이 미키코에게 알린 암살계획의 내용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밖에도 ▶문이 범행에 사용한 자금의 출처 ▶일본 내 조총련 배후 세력 등을 자세히 물었다.
◆ 일본 측 결론= 한국 측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오사카지검은 그해 12월 "김과 문이 접촉은 했으나 범행과 직접 관련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문의 단독 범행이라는 것이다. 미키코 역시 여권 부정발급만 도왔을 뿐 대통령 암살계획은 몰랐다고 결론내렸다. 일본 수사본부는 문의 사형 집행 다음달인 75년 1월 문의 사망을 이유로 영구미제사건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두 나라의 견해차를 좁힐 기회는 사라져버렸다
쎄면바리 쎄면쏘냐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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