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
[편집] 만주군 장교 활동 (1940 ~ 1945)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직후 '예비소위' 시절의 박정희[34]
박정희는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의 1939년 3월 11일자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하였다.[35][36] 현재 박정희가 쓴 혈서는 남아 있지 않으나, 혈서에 대해 보도한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누리꾼들은 혈서의 원본이 없고, 일본신문의 기사를 무조건 믿을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의문점을 제기하기도 했다.[37] [38] 혈서로 쓴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39]
동봉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첨부되어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40]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41]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한다. 그리고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42]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이 시기 박정희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43] 하지만 비밀독립군설은 관련 증언을 토대로 날조임이 밝혀져 있는 상태이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투사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투사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군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 반면,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44] 정설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의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서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되었다.[45][46] 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에도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내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47] 한편 박정희와 같이 만주 제8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48]
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군속) 계
군관시절 박정희는 일제 성명 강요에 의해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49]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때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사 시절 자신을 핍박하였던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 사과를 요구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래는 제자인 이순희의 증언이다.
아... 쎄면쏘냐 ^^
비도 그쳤는데 절라잉여 열폭 고마하고 노가다 나가라.
가족들 끼니는 스스로 책임 져 부러라.
털리고도 또 들고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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