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해외재산은닉 주범으로 알려진 이후락 박정희 쿠데타이후부터 권력의 핵심이었고, 유신체제건설의 주역이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10월31일 사망했다. (박정희 정권을 수호하는 비밀경찰조직 '중앙정보부'의 수장이었던 김형욱과 이후락의 어색한 동행) "야, 너 얼마 빼돌렸어." "그런소리마라. 난 깨끗하다. ㅋㅋㅋ" 이미 78년 미하원의 한국정부 뇌물공여사건을 밝히기 위한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의 해외재산은닉 심부름꾼으로 밝혀진 이후락이었지만, 그의 죽음과 더불어 미국 전역에 널려있는 엄청난 부동산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에서 어떤 개인적 사업활동도 하지 않았던 자가 최대 5000만 달러까지로 추산되는 부동산(기타 재산은 제외)을 보유하고 있었단 것은 다시말해 자신이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을 당시에 취득해놓은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이미 전에도 몇번 현대사 관련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79년 박정희가 사살되자 수일후 이후락은 미국으로 긴급히 출국하여 언론에선 그가 박정희의 지시로 해외에 은닉해놓은 재산의 처리를 위해 출국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당시의 신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날 것이다. 이듬해인 80년 4월 귀국하자, TV 방송에선 공항에서 생중계 인터뷰까지 하며 이후락과 관련된 소문의 진상을 추궁하였다. 나도 당시 시청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의 부정축재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그 유명한 '떡고물'발언이 나왔다. 즉, 떡(뇌물)을 만든 사람은 박정희이고, 자신은 떡을 만들다보면 발생하는 '고물'만 먹었을 뿐이라며, 부정은 박정희가 주범이라며 회피성 발언을 하였다. 그해 5월 신군부에 체포되어 부정축재 환수시에도 그는 김종필에 이어 랭킹 2위를 달렸다. 그러나 이때의 환수액에 대해 당시 동아방송에선 눈가리고 아웅한다는 논평까지 발표하는 것을 들었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축재금액 대비 회수금액이 형편없다는 비판이었다. 또다른 소문에 의하면, 그의 명의로된 해외은닉재산 환수를 위해 당시 전두환이의 지시에 의해 보안사주재로 박모씨(알것이다.)의 딸을 동행시켜 미국, 스위스등의 은행에서 예금을 찾아왔다는 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부터 중앙정보부장의 역할중 하나는, 김형욱의 예에서 보았듯이 박정희의 통치자금으로 조성된 각종 잇권 및 부정축재 자금을 해외(미국과 스위스)은행에 은닉해 두는 것이었다. 이 점은 김형욱이 미 하원에서 증언한바 있으니, 박정희 광신도들께선 새삼스럽게 "막걸리밖에 사먹을 돈이 없었던 분(X까...)인데 무슨 딸라 은닉이냐" 고 항의하시지 말기 바란다. 방송에서 박정희를 어버이같은 존재라고 지껄였던 전두환이도, 전재산이 29만원밖에 없음에도 수행원을 수십명씩 몰고 골프치러 다니지 않았는가? 이러한 해외재산은닉과정에서 '떡고물'이란 표현의 삥땅수법으로 김형욱과 이후락이 재산을 불려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박정희의 초기 통치자금은 '한일협상'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제공된 징용보상금등 3억 5천만달라를 가로채서 이 돈으로 기업들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통해 개인적 축재와 권력유지비용으로 전용되었음은 이미 수년전 해제된 비밀 외교문서에 의해서도 입증된바 있다. *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K161&articleId=110896]로 이동합니다."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K161&articleId=110896" target=_blank>일제징용보상금을 가로챈 박정희 한번 부정축재기법을 익힌 박정희에겐 나날이 축재의 범위와 테크닉이 늘어만 갔다. 당시 박정희에게 지속적으로 안정된 수익을 올리게 해준 축재기법중 하나는 해외차관 도입시 '리베이트'였다. 60~70년대 국내의 사채 이자는 보통 20%이상이었는데, 박정희는 해외차관을 도입하는 기업들에 국가 보증을 서주는 댓가로 5~10%정도의 저렴한(?) 이자(리베이트)를 받아 챙겼다. 박정희 사망시 외채가 220억 달러 정도였으니 박정희가 뜯어낸 '삥'이 어느정도였는지 알아서 짐작하시길... 물론 이 돈이 바로 해외재산은닉시의 주요자금이었음은 불문가지였으며, 중앙정보부장이 이 역할의 하수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형욱은 상당한 축재와 동시에 재산의 해외유출기법을 터득했다. 72년 유신체제성립과 더불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김형욱은 박정희의 비리를 지나치게 알고 있던 자신의 숙청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려야했다. 그리하여 국내에 뿌려져 있던 사채를 회수하여 해외밀반출한뒤에 미국으로 튀었다. 한편 이후락도 73년 중앙정보부장 해임후, 김형욱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워 이듬해인 74년 미국으로 도주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부정축재와 해외재산은닉의 종범들인 두 인물의 해외 도주에 대해 '미하원 뇌물공여사건' 발생후 적잖이 당황해야했다. 권력내부적으로 이들을 달래서 귀국시켜 말썽소지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김종필등 정부 고위인사들을 보내어 지속적으로 귀국을 종용했는데,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자신의 생명을 보장한다는 각서를 요구했고, 박정희는 백지에 자신의 사인을 적어보내서 응답했다. 그러나 김형욱은 이를 믿지 않고 귀국을 거부하고 끝내 '프레이져 청문회'에 출석하여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증언하게 되었고, 결국 박정희에 의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 김형욱이 해외에 빼돌린 재산 1500만 달러에서 3000만 달러로 추정 어찌되었든, 이미 사망한 박정희 돈심부름꾼 김형욱과 이후락의 막대한 해외 재산을 통해서 주범이었던 박정희의 해외재산 은닉규모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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