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들 보다보면 해저 탐사, 시추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있습니다.
문제는... 계약 조건에 맞춰 $를 최대한 뽑아먹는 경우가 기본 스탠드라고 하더군요.
해양 사건사고나 시추건 다큐에서 은근슬쩍 대놓고 까고 있는 부분들..
즉 무슨말이냐면 조사 필요성이 있다하고 맡기기만 하면 $가 살살 녹는다는겁니다.
저 바닥에선 아주 일상화된 꿀통이라는거죠.
그리고 살살 녹는거는 어디로 가나? 네 로비자금이죠.
덤으로 해양 측정정보가 해외로 빠져나갑니다.
군사/민간/자원 정보 알짜배기가 싹 나감.
$를 못 뽑아 먹어도 저 정보가 해외로 나가는건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뭔 말이냐면 저기 대한해협 가깝죠?
한,중,일,러, 잠수함 피 말리는 민감한 동네죠?... 꿀 정보죠. 진짜 꿀임.
돈 해 먹는건 안보 이슈 앞에선 알고보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해저 측정 자료는 수백년단위로는 왠만하면 안바뀌니까요...
경상북도 포항 지역은 예전부터 석유 부존 가능성이 제기되던 곳이었고 이미 1964년에 정OO가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 및 국립지질조사소에서 합동으로 시추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천연가스는 소량 발견되었지만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이 내려져서 중단되었다.
이전부터 포항 지역이 지목된 근거는 다음의 2가지였다.
삼국유사에 경주 일대에서 사흘 동안이나 불길이 솟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질 조사 결과 포항 지역이 신생대 제3기층[1]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삼국유사 기록이 진실이라는 근거는 없다.[2]
해당 지층이 3기층이기는 하나 퇴적층이 너무 얇고 화강암 위주이다.
정OO의 형인 정△△는 정치권[3]을 대상으로 치열한 로비를 벌였고 결국 이러한 논의는 대통령 박정희에게까지 보고가 이루어졌다.[4] 당시는 1974년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물가상승률이 20%대로 치솟을 정도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박정희는 '석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수많은 지질 관계 전문가들이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반대했음에도 박정희는 "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디엔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부 주도로 석유 시추를 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또다시 포항 영일만 일대 지역에서 석유 시추가 재개되었다.
1975년 비밀리에 시작된 포항 석유시추는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중앙정보부가 맡아서 'OO산업공사'라는 위장회사의 명칭으로 진행하되 앞서 언급한 정△△가 참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실제로는 시추 현장에서 정△△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고 전한다.
갑자기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한국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군부독재 정권, 특히 10월 유신으로 박정희가 종신집권 체제를 완성한 직후였다. 중앙정보부는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절대권력자 박정희의 지시 아래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하던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다. 심지어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서 한때 양지 축구단도 직접 운영했을 정도로 당시 정보부는 안 끼는 데가 없었다.[5] 이런 이유로 막대한 자금과 보안이 필요한 석유 탐사도 중앙정보부가 직접 맡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의 석유개발 국가기관으론 대한석유공사가 있었으나, 미국 걸프 오일과 합자 회사였기에 유공이 중심이 되어 개발하면 소득의 일부가 고스란히 미국으로 들어가는 형편이었다.[6] 이런 사정에 더해 다른 탐사현장 운영을 맡길 유관 기관은 국립지질조사소와 대한광업진흥공사 정도인데, 앞서 가능성이 없다고 반대한 지질 관계 전문가들이 대부분 이 두 곳에 소속된 인원들이었다.
1975년 5월 중앙정보부는 포항 영일만 인근에 시추공 3개(이하 편의상 A, B, D공으로 서술)를 뚫기 시작했다. A공은 지하 1150m 지점에서 단단한 화강암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석유는 퍼석한 퇴적암층이라야 발견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파도 파도 퇴적암층은 안 나오고 강철 같은 화강암층만 나오니 현장의 전문가들이 "그만 끝냅시다."라고 말했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어 B공도 12월까지 지하 1400m을 팠지만 결국 화강암층에 막히고 말았다. 정△△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현장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으로 시추를 종료하려고 했다.
그러던 1975년 12월 3일 새벽 갑자기 B공에서 시커먼 액체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단단한 화강암층을 통과하던 B공 시추봉이 지하 1475m 지점에서 갑자기 푹 꺼지더니 2m 정도를 더 파고들었고 여기에서 원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양을 다 합쳐 봐야 드럼통 한 개 남짓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시추 현장은 난리가 났고 현장 근로자들은 이 액체를 정신없이 퍼담았다. 시추 성공 사실은 즉시 청와대에 보고되었으며 이 원유샘플은 부랴부랴 직접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정부 각료들은 모두 기뻐했고 일부는 직접 맛을 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분이 좋아진 박정희 대통령은 보안이 필요했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공식행사에서 원유가 나온 것 같다는 사실을 슬쩍슬쩍 흘렸다. 결국 포항에서 석유가 터졌다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포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 매장량 등은 정부에서 확인 중이니 국민들은 차분히 기다려 주실 것'이라는 요지로 공식 발표를 해버렸다.
원유라는 물질은 휘발유·등유·경유·중유와 가스, 기타 성분이 죄다 섞인 비빔밥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원유에 불을 붙이면 먼저 빠져나온 가스 성분이 한꺼번에 타면서 순간적으로 펑 하는 불꽃을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포항 석유는 그냥 얌전하게 탔다. 화학공학을 전공했던 오원철 수석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그 '원유'가 담긴 병을 받아온 뒤 전문가들에게 샘플을 보내어 분석하게 했다. 이 전문가들 중에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석유화학회사 호남정유[8] 분석 결과 역시 상당히 수상쩍어서 원래 많든 적든 온갖 성분이 다 섞였다고 나와야 할 증류시험 그래프에서 경유 성분만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보인 사안에서 물러서기 어려웠던 중앙정보부는 정말 과연 원유가 맞는지, 매장량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탐사를 계속했다. 일단 처음에 기름이 올라온 B공 북서쪽으로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DS1 공을 다시 뚫었다. 그런데 분명히 B공에서 기름이 나왔다는 그 심도를 통과했는데도 겨우 수십 미터 떨어진 DS1 공에서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B공 남쪽 불과 20m 떨어진 곳에 DS2 공을 뚫었으나 역시 기름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뒤로도 주변 일대에 여러 시추공을 더 뚫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맨 마지막에 뚫은 DS4 공은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강암층을 무려 3117m나 뚫었다고 하니 그때 기술자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당시 한국에도 전문가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원유가 매장된 퇴적층은 보이지도 않고 화강암층만 계속 나오자 "이곳에서 원유 나올 일이 없으니 그만 탐사 끝내야 한다." 하는 의견을 계속 냈다고 한다. 원래 원유가 매장된 유전은 적어도 수 제곱킬로미터 구역 전체를 아우르는 같은 층에 걸쳐 있으므로, 정상적인 원유 탐사라면 적어도 수 제곱킬로미터, 최대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구획을 설정하고 구획 하나에 한두 개 뚫어 보고 끝내며 이후 대륙붕을 탐사할 때는 우리도 그렇게 했다. 시추공에서 기름이 안 나온다고 불과 몇십 미터 옆에서 다른 시추공을 뚫기는 이미 석유 탐사도 뭐도 아니고, 세계 석유 개발 역사상 이런 시추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머나먼 한국까지 불러 와 놓고 이런 한심
한심한 꼴이나 지켜보게 하는 데 짜증난 미국의 유전 탐사 전문가들 중 한 명이 "당신들은 차라리 금을 찾는 게 낫겠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이미 중앙정보부조차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는 지경까지 와 있었기에 하릴없이 땅만 계속 파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상세히 추적하여 최초로 보도한 사람이 당시 부산에 기반을 둔 국제신문 사회부 조갑제 기자였다.[9] 그리고 이 보도를 일본의 산케이 신문이 받아서 다시 보도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이 소동이 알려졌다. 조갑제 기자는 포항 석유 발견 사건 당시의 취재자료를 가지고 아예 <한국의 석유개발: 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라는 논문을 써서 관계기관에 보냈다.
조갑제는 논문에서 해당 지역 지형을 분석한 결과 등을 토대로 "可採(가채)매장량은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약 3천만 배럴이었다. 경제성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매장량은 적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설사 포항 지역에 원유가 진짜로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과 같은 산유국의 오일맨들이었다면 경제성이 전혀 없으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유전 개발 여부는 경제성으로 판단한다. 아무리 원유가 발견되어도 본격적 시추 개발에 따른 수익이 나지 않으면 시추하지 않는다. 석유 시추를 하다 보면 소량의 원유는 자주 발견되나 실제로 경제성이 있는 유전 발견은 전체 2% 정도에 불과하다.
신문보도 및 논문 작성을 끝내고 나서 조갑제 기자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불려가 석유 시추를 취재한 경위를 조사받게 되었다. 당시 석유 탐사 소식이 너무 부풀려진 나머지 중앙정보부 주도로 언론통제에 들어갔는데, 조갑제 기자가 지나치게 정확한 기사를 보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막간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때 조갑제 기자를 담당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이 바로 10.26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인 박선호였다. 조갑제 기자는 뒷날 "나쁘지 않은 대접을 받았고(아마 자신이 기자여서 그랬겠지만), 박선호는 날카롭지만 신사다운 풍모를 지녔었다"고 평가했다. 대접이야 나쁘지 않았다지만 조갑제 기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신문사에서 쫒겨났고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에서 김재규로 바뀐 뒤에야 소문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조용히 복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선끌기용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네요
자기 돈 아니라고 펑펑..
국가운영을 위해 세금을 쓰려면 적어도 국무회의는 통과해야 하지 않나 ??
국무회의 회의록이 궁금하다
굥 저시나랄
돼지라 안쳐먹는게 없네
문제는... 계약 조건에 맞춰 $를 최대한 뽑아먹는 경우가 기본 스탠드라고 하더군요.
해양 사건사고나 시추건 다큐에서 은근슬쩍 대놓고 까고 있는 부분들..
즉 무슨말이냐면 조사 필요성이 있다하고 맡기기만 하면 $가 살살 녹는다는겁니다.
저 바닥에선 아주 일상화된 꿀통이라는거죠.
그리고 살살 녹는거는 어디로 가나? 네 로비자금이죠.
덤으로 해양 측정정보가 해외로 빠져나갑니다.
군사/민간/자원 정보 알짜배기가 싹 나감.
$를 못 뽑아 먹어도 저 정보가 해외로 나가는건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뭔 말이냐면 저기 대한해협 가깝죠?
한,중,일,러, 잠수함 피 말리는 민감한 동네죠?... 꿀 정보죠. 진짜 꿀임.
돈 해 먹는건 안보 이슈 앞에선 알고보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해저 측정 자료는 수백년단위로는 왠만하면 안바뀌니까요...
포항은 대형지진 몇번 더 쳐맞고 개돼지들 대가리 수좀 줄어들어야함
이말이 맞음?
???포항사람인데 이건좀 아니지 않나?
나는 물론 국힘지지자 아님
진짜 기분 더럽네
도대체 얼마나 더 해쳐먹을라는거여~~~~~~~~~~~~
저런건 쥐바기가 전문이니까
경상북도 포항 지역은 예전부터 석유 부존 가능성이 제기되던 곳이었고 이미 1964년에 정OO가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 및 국립지질조사소에서 합동으로 시추한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천연가스는 소량 발견되었지만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이 내려져서 중단되었다.
이전부터 포항 지역이 지목된 근거는 다음의 2가지였다.
삼국유사에 경주 일대에서 사흘 동안이나 불길이 솟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질 조사 결과 포항 지역이 신생대 제3기층[1]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삼국유사 기록이 진실이라는 근거는 없다.[2]
해당 지층이 3기층이기는 하나 퇴적층이 너무 얇고 화강암 위주이다.
정OO의 형인 정△△는 정치권[3]을 대상으로 치열한 로비를 벌였고 결국 이러한 논의는 대통령 박정희에게까지 보고가 이루어졌다.[4] 당시는 1974년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물가상승률이 20%대로 치솟을 정도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박정희는 '석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수많은 지질 관계 전문가들이 모두 가능성이 없다고 반대했음에도 박정희는 "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디엔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정부 주도로 석유 시추를 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또다시 포항 영일만 일대 지역에서 석유 시추가 재개되었다.
1975년 비밀리에 시작된 포항 석유시추는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중앙정보부가 맡아서 'OO산업공사'라는 위장회사의 명칭으로 진행하되 앞서 언급한 정△△가 참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실제로는 시추 현장에서 정△△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고 전한다.
갑자기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한국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군부독재 정권, 특히 10월 유신으로 박정희가 종신집권 체제를 완성한 직후였다. 중앙정보부는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라 절대권력자 박정희의 지시 아래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좌지우지하던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다. 심지어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서 한때 양지 축구단도 직접 운영했을 정도로 당시 정보부는 안 끼는 데가 없었다.[5] 이런 이유로 막대한 자금과 보안이 필요한 석유 탐사도 중앙정보부가 직접 맡게 된 것이다.
그러던 1975년 12월 3일 새벽 갑자기 B공에서 시커먼 액체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단단한 화강암층을 통과하던 B공 시추봉이 지하 1475m 지점에서 갑자기 푹 꺼지더니 2m 정도를 더 파고들었고 여기에서 원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양을 다 합쳐 봐야 드럼통 한 개 남짓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시추 현장은 난리가 났고 현장 근로자들은 이 액체를 정신없이 퍼담았다. 시추 성공 사실은 즉시 청와대에 보고되었으며 이 원유샘플은 부랴부랴 직접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정부 각료들은 모두 기뻐했고 일부는 직접 맛을 보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분이 좋아진 박정희 대통령은 보안이 필요했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공식행사에서 원유가 나온 것 같다는 사실을 슬쩍슬쩍 흘렸다. 결국 포항에서 석유가 터졌다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6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포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 매장량 등은 정부에서 확인 중이니 국민들은 차분히 기다려 주실 것'이라는 요지로 공식 발표를 해버렸다.
그러나 대통령이 지대한 관심을 보인 사안에서 물러서기 어려웠던 중앙정보부는 정말 과연 원유가 맞는지, 매장량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탐사를 계속했다. 일단 처음에 기름이 올라온 B공 북서쪽으로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DS1 공을 다시 뚫었다. 그런데 분명히 B공에서 기름이 나왔다는 그 심도를 통과했는데도 겨우 수십 미터 떨어진 DS1 공에서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중앙정보부는 B공 남쪽 불과 20m 떨어진 곳에 DS2 공을 뚫었으나 역시 기름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뒤로도 주변 일대에 여러 시추공을 더 뚫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맨 마지막에 뚫은 DS4 공은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강암층을 무려 3117m나 뚫었다고 하니 그때 기술자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당시 한국에도 전문가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원유가 매장된 퇴적층은 보이지도 않고 화강암층만 계속 나오자 "이곳에서 원유 나올 일이 없으니 그만 탐사 끝내야 한다." 하는 의견을 계속 냈다고 한다. 원래 원유가 매장된 유전은 적어도 수 제곱킬로미터 구역 전체를 아우르는 같은 층에 걸쳐 있으므로, 정상적인 원유 탐사라면 적어도 수 제곱킬로미터, 최대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구획을 설정하고 구획 하나에 한두 개 뚫어 보고 끝내며 이후 대륙붕을 탐사할 때는 우리도 그렇게 했다. 시추공에서 기름이 안 나온다고 불과 몇십 미터 옆에서 다른 시추공을 뚫기는 이미 석유 탐사도 뭐도 아니고, 세계 석유 개발 역사상 이런 시추는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머나먼 한국까지 불러 와 놓고 이런 한심
이러한 과정을 상세히 추적하여 최초로 보도한 사람이 당시 부산에 기반을 둔 국제신문 사회부 조갑제 기자였다.[9] 그리고 이 보도를 일본의 산케이 신문이 받아서 다시 보도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이 소동이 알려졌다. 조갑제 기자는 포항 석유 발견 사건 당시의 취재자료를 가지고 아예 <한국의 석유개발: 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라는 논문을 써서 관계기관에 보냈다.
조갑제는 논문에서 해당 지역 지형을 분석한 결과 등을 토대로 "可採(가채)매장량은 아무리 최대치로 잡아도 약 3천만 배럴이었다. 경제성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매장량은 적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설사 포항 지역에 원유가 진짜로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과 같은 산유국의 오일맨들이었다면 경제성이 전혀 없으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예나 지금이나 유전 개발 여부는 경제성으로 판단한다. 아무리 원유가 발견되어도 본격적 시추 개발에 따른 수익이 나지 않으면 시추하지 않는다. 석유 시추를 하다 보면 소량의 원유는 자주 발견되나 실제로 경제성이 있는 유전 발견은 전체 2%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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