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비서들이 전하는 DJ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면에 들어간 23일 고인의 55년 정치역정 내내 ‘가장 가까운 그림자’였던 수행비서들은 마지막 길까지 곁을 지켰다. 집에서, 승용차에서, 역사의 숱한 현장에서 몸이 불편한 김 전 대통령을 수행한 그들이었기에 상심의 깊이는 남달랐다. 이들은 “강인함 뒤에 인자함” “철저한 완벽주의자” “소탈한 분”으로 고인을 기억했다.
수행비서들은 예외 없이 모두 1주일에 3~4권씩 책 심부름을 했다. 평화민주당 대표시절인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수행비서였던 전갑길 광주 광산구청장(52)은 “신문 신간서적 소개란에 동그라미를 치시고 그 책을 사오라고 했다”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는데도 그 많은 책에 손때가 묻어있다”고 전했다. 이어 “아무리 짧은 연설이라도 방에서 2시간 이상 소리 내며 연습하곤 하셨다”며 “ ‘대중연설의 1인자’라는 별명 뒤에는 이런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옆사람일수록 어디 가서 옷매무새 하나 실수가 없도록 당부했다”며 “스스로도 밤 12시 전에 잔 적 없이 4~5시간씩만 자면서 취침 전에는 독서로, 아침에는 국내외 신문 정독과 사색으로 머리를 정리했다”고 기억했다. 고인이 즐겼던 토막잠에 대해 전 구청장은 “차에서 ‘10분쯤 쉬겠다’고 말씀한 뒤에는 1분도 안돼 잠이 들고 꼭 깨우기 전에 먼저 일어났다”며 “마인드 컨트롤이 생활화되신 분”이라고 말했다.
1993년부터 3년여간 수행비서로 일한 장홍호 전 청와대 행정관(50)은 “특별하다는 생각보다 평등하고 동등하다는 마음으로 아랫사람들을 대하셨다”고 말했다. 일산 집에 머물던 시절 하루는 자신의 아침상엔 별식이 오르고 비서진 밥상에는 빠졌다고 한다. 이를 본 김 전 대통령은 “저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니 언제나 밥상은 똑같이 차리라”고 지시했다. 장 전 행정관은 “그 말을 듣고 자상함과 세심함에 목이 메어 밥이 안 넘어가더라”고 말했다. 그는 “바깥에서 조찬·오찬 약속이 있는 날에는 밥을 해주는 아주머니에게 ‘저녁만 하러 수고스럽게 오지 마시라’며 대신 짬뽕을 시켜드시곤 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과 수행비서를 이어주는 상징물은 ‘지팡이’였다. 1971년 무안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고관절 변형증으로 고생한 고인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팡이를 짚기 시작했다.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79)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주도로 5년형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복역하던 시절,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구속집행정지 결정으로 풀리던 날 집으로 가며 처음 지팡이를 짚었다”며 “그때부터 지팡이는 민주화의 상징, 가시밭길과 고난의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장 전 행정관은 “김 전 대통령은 지방을 다니다 몇 만 원짜리 지팡이를 손수 구입해 사용하셨다”며 “5개 정도의 지팡이 중에 그 날 양복과 신발에 어울리는 것을 사용했다”고 기억했다.
고인은 지난달 13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할 때도 “중간에 일어서거나 퇴원할 때 사용하려고”(최경환 비서관) 지팡이를 가져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투병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수행비서들은 작별 인사를 전했다. “세계적인 지도자를 곁에서 모신 것 한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곁에서 본 모든 것을 철학으로 삼고 살아가겠습니다.”(전갑길), “아버지처럼 모시던 분이 영원히 곁을 떠난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편히 영면하십시오.”(장홍호)
청와대 시절과 퇴임 후를 지킨 마지막 비서 이재만·박한수 전 행정관 2명은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며 완곡히 취재를 거부했다.
- 경향신문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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