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감고 나오다가 동네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하셨대요. 순간 멍했다. 곧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환이었고, 생은 욕망이나 희망 혹은 필요나 간구로 잡을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착잡하고 쓸쓸하고 맥이 풀리는 것은 비슷한 공감대의 영역에 있던 대통령을 잃은 것이 불과 몇 달 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한 달 생의 마지막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듯한 대통령의 기사를 읽으면서, 그를 찾아가는 온갖 정적과 친구와 야망과 후회와 세월들을 보면서, 그는 참 강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의지만 있다면, 누구라도 살아 있는 동안 제 삶의 모습을 어떻게든 갈무리할 수 있겠지만, 죽음의 순간을 그토록 차분히 갈무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정기 검사를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갔더니 마침 전직 대통령이 문병 차 방문하던 중이었다. 4층 접수창구에 서 있자니 3층 현관으로 들어오는, 한때 사형선고까지 내렸던 전직 대통령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 순간 생뚱맞게도 ‘맞다.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에게 미안하다, 제스처든 진심이든 말할 시간을 주는 것, 그것이 그 분이 택한 마지막 배려이자 인격이겠다 싶었다. 한 인간으로서 그가 보여준 생의 마지막은 분명 잊지 못할 감동이다.
완벽하게 막을 내린 ‘한 시대’
그렇게 한 시대가 갔다. 정말 완벽하게 막을 내렸다. 시대가 가면 다시 한 시대가 와야 하는데, 지금 남은 시대는, 과연 ‘시대’라고 묶일 만한 무엇인지 모르겠다. ‘시대’라는 말 속에는 공동의 운명, 공동의 정신, 공동의 무언가가 깃들어야 할 것 같은데, ‘자본’과 ‘개발’ 말고 지금 시대가 무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켠 TV에서 들리는 각 정당의 추모 논평이 이런 우울함에 부채질을 한다. 특히 그 중 한 정당의 논평은 듣다가 귀를 의심했다.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큰 정치인으로서’, ‘과정과 내용에 논란이 많았지만 한반도 통일을 향한 열정과 의지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자치단체의 수장이나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위원을 추모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특정 지역을 대표했다고 표현하는 건 폄훼이자 왜곡이고 무례다. 고인의 업적이라고 노벨상을 거론하면서 논란과 의혹을 함께 제시하는 것도 업적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조롱이다. 그런 졸렬하고 예의 없는 논평을 정당 차원의 추모 논평이라고 내놓다니, 그게 그들의 수준인 건지 이 나라 정치 수준인 건지 듣는 내내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러하니, 아니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추모는 더더욱 국민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산자의 형평도 가늠하지 못하면서 죽은 자의 형평을 논하며 장례 방식을 결정하는 이들이 있듯 죽은 자들의 업적과 가치를 비교하여 평가하고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도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걸 정치적 이용이나 추종자들의 선동으로 폄훼한다면 그건 자신의 한계와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서거를 ‘정국’으로 만든 건 추모하는 자들이 아니라 추모를 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진정한 추모는 국민들의 몫
작가 김연수는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모두 이 두 번째 회고담이다.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지금 우리의 추모는,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더라도 인사는 해야지.
안녕히 가세요. 대통령.
- 한지혜 소설가
= 출처 : 경향신문
소금 안뿌린걸 다행으로 알드라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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