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에서 얻은 결론들 북한의 자기自己 이해 방문객을 맞은 김대중 대통령은 정신을 완전히 집중시킨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고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두 달 전에 가택 연금이 해제되었으나, 그에 대한 감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과 독일의 정세, 하버드대학 시절에 알던 지인들, 그리고 사형과 구금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고 한 국제사면위원회의 노력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미소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대화할 때 상대방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의 에너지, 의지력, 관심, 그리고 박학다식함은 경탄을 자아낸다. 측근들은 힘겨운 준비 작업을 하고 해외로 장시간비행기 여행을 하면 현지에 도착할 때쯤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시차 적응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김대중 대통령은 쾌활하고 활력이 넘치며 도착한 후에는 언제나 곧바로 회의를 가졌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상대방을 잘 배려하고 호감을 주며 풍부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지마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언제나 엄격하다. 그리고 때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엄격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부드러움뿐 아니라 강한 면모도 갖추었다. 그가 최종적으로 발언을 하면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다고 한다. 한국의 전직 외교관 중 한 사람은 김대중대통령은 황제처럼 옥좌에 앉아 명령을 하달하는 인상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처럼 이렇게 강한 인상을 주고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물을 몇 문장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단지 그의 몇 가지 측면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대통령으로서의 직무 수행, 한국인이자 세계인으로서의 김대중, 현실적 감각의 이상주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외에서는 놀라운 명망을 누리지만 정작 자국에서는 다르게 평가 받기도 하는 그에 대한 상이한 평가들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한국과 독일, 그리고 통일이라는 주제 한국과 독일을 결합시키는 것으로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분단과 통일의 경험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러 차례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의 분단과 관계정상화, 통일 문제 등을 연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수십 년에 걸친 성찰과 독일에서의 상황 전개를 분석한 결과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분단을 맞았다. 일종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러나 분단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간에는 언제나 접촉, 만남, 그리고 다양한 교류가 있었다. 한국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 후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자신의 책임과는 무관하게 분단의 운명을 맞은 셈이었다. 무력이 동원된 한국전쟁은 분단을 더욱 고착시켰다. 분단 때문에 한반도에는 아직까지 접촉이나 만남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일은 평화적인 통일을 맞은 10월 3일을 ‘통일의 날’로 경축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10월 3일이 경축일이기는 하지만(아직) ‘통일의 날’이 아니라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開天節)이다. 이는 비록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남북한은 독일의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 나타난 결과를 예의 주시해왔다. 한국은 이를 통해 통일은 가능하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소요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북한은 아마도 통일은 한쪽이 승자가 되고 다른 쪽은 패자가 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북한은 언제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당연히 패자가 되기도 원치 않으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고 있다. 평양은 독일 통일의 가공할 교훈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과거 동독은 오랫동안 서독에 ‘현실의 인정’을 요구했다. 에곤 바르가 구상한 ‘접근을 통한 점진적 변화 정책’과 빌리 브란트 총리 시절의 ‘동방정책’은 동독의 실체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서독의 단독 대표성(할슈타인 독트린)의 포기, 1970년 3월과 5월에 열린 브란트 총리와 슈토프 총리 간의 동서독 정상회담,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1972), 동서독 유엔 동시 가입(1973), 독일(문화) 민족의 공동 존속 강조, 그리고 인도적 조치를 통한 분단의 여파 완화(특히 베를린 지역)를 위한 집요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책은 추진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방정책’ 추진 초기에 빌리 브란트 총리를 배신자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현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동방정책’이 독일 통일을 이끌었거나 최소한 통일을 위한 중요한 여건을 창출한 것은 분명하다. 고르바초프 시절 구소련의 변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의 인정, 새로운 구상, 일방적 지원, 많은 시간과 인내, 교류협력 강화, 구동독에서의 평화적 혁명, 그리고 변화된 국제 정세 등이 결국 통일의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구동독이 건국된 지 41년, 베를린 장벽이 건조된 지 29년, 그리고 ‘동방정책’이 시작된 지 21년 만에 독일은 통일을 맞이했다.
“통일은 결국 한민족의 일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과 관련해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독일 통일의 사례를 연구하고 이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처음부터 현실을 인정하고 장기적 시각에서 정책을 추진해야 하며, 최장 20년이 걸린 연방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현실을 인정하고 상호 접근과 관계정상화를 하지 않으면 남북통일이 달성될 수 없을 거라고 본 것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독일식 모델을 지향했는데 물론 그 방식은 달랐다. 그는 의도적으로 용어를 차용해 ‘북방정책’을 발표했다. 북한 지도부는 독일에서 사태 발전을 연구한 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즉, 독일의 ‘동방정책’은 통일과 구동독의 종말을 가져왔는데, 이제 한국이 의도적으로 독일식 모델을 지향해 ‘북방정책’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도출한 두번째의 결론은, ‘동방정책’은 구동독을 개혁으로 유도했는데, 이러한 개혁은 체제를 안정시켜준 것이 아니라 결국 구동독의 붕괴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동방정책과 북방정책 그리고 개혁정책과 관련하여 북한의 김일성 전 주석이 한 외국 외교관에게 들려준 대답은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인사 중 한 사람인 한스 마레츠키(전 북한 주재 동독 대사)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북한 정권은 놀라울 정도로 잘 작동하는 정권이다. 지구상에서 북한 정권을 제외하면 완전한 전체주의적 국가 권력이 수십 년간 계속 유지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북한 지도부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잘 통찰하는 것은 ‘햇볕정책’의 성공을 위한 기분 전제 조건에 속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산주의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서서히 변화를 맞고 있다. 공식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불리는 북한에는 건국 이후 단지 두 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父子)가 그들이다. 북한은 동독이 아니다. 단지 쿠바와 리비아 정도가 북한이 유지해온 영속성에 좀 근접한다고 할 것이다.
한국에서 민중 봉기, 정치적 암살, 정치 소요, 집단 시위와 쿠데타가 있던 동안, 북한은 대외적으로 안정과 결속의 아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다
그의 인품관 정치관
개인적 서문
1987년 9월 서울, 우리 일행 네 명은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의 운전사는 혹시 있을 미행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모든 능력을 발휘했는데, 갑자기 방향을 바꾸고 우회로를 달리는가 하면 가끔은 교통 신호등도 무시하고 달렸다. 그런데 도착하면서 보니 좁은 골목 양측에는 경찰의 견고한 경계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김대중 부부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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