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개혁적이라고들 하는 시민운동 집단을 ‘홍위병’ 또는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대안 매체로 떠오는 인터넷 신문이나 공론장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하늘의 뜻에 대한 DJ의 소명의식
인간 김대중은 누구인가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여론 주도 집단도 나름의 편 가르기를 심화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 이들은 은연중에 DJ와 그 지지 세력을 주변의 자리로 밀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사회의 주류, 즉 중심 세력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했다.
DJ 진영은 인물, 지역, 이념, 능력 등의 면에서 질이 형편없다는 식이었다. 이것이 의도적 행위인지 의도치 않은 결과인지를 확인하기는 힘드나 드러난 것으로만 보면, 이들은 DJ를 갈수록 협소한 상징의 공간으로 밀어내면서 다수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조직적인 담론을 펼쳤다. 여기서 편 가르기는 중심 세력과 주변 세력, 다수와 소수,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으로 나타났다.
이런 관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이들 여론 주도 집단이 DJ에게 원했던 것은 개혁과 반개혁의 잘못된 이분법을 떠나서 자신들이 대변하는 중심, 다수, 주류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핵심 메시지였다. 그러나 DJ는 끝까지 이런 요구를 일축했다. 그리고 꼿꼿한 자세로 자신의 길을 걸었다. 완고하리만큼 집요하게 대북정책의 기조를 견지했고, 지배적 신문 매체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기업, 금융 등 4대 부문의 구조 개혁을 이끌었고, 지식정보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가끔 외로운 심정으로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말도 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이점이 궁금하다. DJ도 인간인데 왜 이러한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 누가 봐도 소수파의 한계는 분명한 반면, DJ는 현실 정치의 감각이 탁월한 사람인데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면서 그는 왜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간 것일까?
DJ와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좋은 대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경험과 상상력은 제한되어 있다. 이런 일화가 있었다. 2001년 8월 초에 송월주 스님, 이세중 변호사, 손봉호 교수 등을 포함한 우리 사회 원로들이 신문과 정부의 갈등, 이른바 ‘언론 개혁’에 관하여 쌍방에 나름대로 주문을 하는 성명서를 낸 일이 있었다. 입장에 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상당히 공정한 내용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배적 신문들은 그 가운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만을 골라 일방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마치 원들이 정부를 일방적으로 비판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자연히 이런 이미지에 따라 원로들의 행동을 비난하는 소리도 나왔다.
나는 DJ에게 개혁이 성공하려면 중도 세력 또는 중도 개혁 세력을 품에 안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개혁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상징과 이미지의 포섭 효과를 넓혀가는 인문들이 대통령 주변에 많아야 하다고 주장했다. DJ는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의 중심은 누구보다 DJ 자신이 잡고 있으며, 참모들이 한편으로 쏠린다 하더라도 이것을 바로 잡아줄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솔직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나 DJ는 개혁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자신이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신념이 투철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DJ의 모습을 이해하려면 지난 5년간 우리가 숨 가쁘게 달려왔던 궤적을 잠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5년 전 우리는 건국 이래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맞이하여 다들 환호성을 내며 기뻐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면에서는 또한 엄청난 고통의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외환 위기의 여파로 수많은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전대미문의 대량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참담한 실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민중의 고통에 대해 누가 과연 책임을 질 것인가? 사회 지도층이라면 누구나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해야 할 상황이었다.
내가 속한 학문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사회과학의 책임 윤리에서 볼 때, 수많은 경제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이 있었건만 누구도 우리 경제와 사회체제가 거대한 부실에 휩싸여 국가 부도 사태 직전의 엄청난 국가 위기로 치닫고 있음을 간파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다.
5년의 세월을 보내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퇴임하여 동교동 사가로 돌아온 지도 이제 3개월이 넘었다. 회고해보면, 긴 시간이 빨리도 지났다. 길다는 것은 DJ가 대통령으로서 한 일이 많았다는 뜻이다. 5년간 죽도록 일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는 ‘DJ개혁호’를 항상 선두 지휘했다. 그는 소수파로 출발했고 끝내 그 한계를 넘지 못했지만,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강한 의지와 일관된 자세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 5년이 지나 DJ도 다시 민간으로 돌아왔다.
지난 5년간 나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1980년대 중반 그를 만나 돕기 시작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지만, DJ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그 영향이 나에게도 컸다. 나는 처음부터 권력 진입과는 분명히 선을 그은 상태였다. 그러나 물론 DJ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나는 한국정신 문화연구원의 책임자로서 2년간 일했고, 그후로는 그를 자문하는 정책 기획위원회에서 역시 2년 정도 일했다. 이로써 나는 적어도 4년간 연구와 강의보다 현실 참여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잃은 것도 많다. 그러나 대학 안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소득이다. 특히 정책을 기획하고 평가하며 때로는 강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세상의 반응과 변화를 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나는 김대중 정부가 출발했던 시점과 마쳤던 시점을 놓고, 감정이나 이념을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성과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정밀한 분석과 검증을 요하는 것이며, 좀더 시간을 필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하에서는 이런 엄밀한 분석 대신 유연한 접근을 취하려고 한다. 즉, 인간으로서의 DJ와 그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DJ는 다양하고 심오한 사상을 가진 정치가이다. 그는 다행이 대통령이 되어 적지 않은 사상들을 정책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런 부분들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인권과 민주주의, 시장경제, 남녀평등, 사회복지, 정보혁명 등이 그 예이다. 반면 현실과 긴장을 보이거나 집권의 경험을 거치면서 새롭게 등장한 것들은 한번쯤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DJ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분명한 사실은 그가 우리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왔다는 점이다. 1971년 대선에서 다시 대통령이던 박정희 후보와 아슬아슬한 경합을 벌인 이래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수난과 박해의 상징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5년간 그는 권좌에 올라 막강한 권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때문에 그를 바라보는 눈은 까다롭게 다양하다. 또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뜻한 온정의 눈길이 있는가 하면 싸늘한 경멸의 시선도 있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의 이름 석자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인간 김대중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매운 논쟁적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DJ의 집권 5년을 되돌아보면, 초기에는 상당히 포용적이고 온건한 색채가 강했던 것 같다. 화합과 협력을 강조했다. 정치적으로 DJ 연합이 국정을 이끌었고 인사와 이념, 이미지 등에서 중도 지향의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는 여론 주도층과 날카로운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
그때 한 주제가 바로 개혁과 반개혁의 이분법이었다. 여론 주도 집단은 DJ정부가 이런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반개혁적으로 몰아친다고 비난했다.
이런 식의 편 가르기를 당장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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