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보수언론 무자비한 ‘필탄’ 퍼부어
후광 김대중 평전/[1장] 서설 “행동하는 양심으로” 2009/07/05 08:00 by 김삼웅
김대중의 입장에서는 독재권력의 ‘총구’에서 살아남기도 어려웠겠지만, 보수언론의 무자비한 ‘필탄(筆彈)’도 견디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고, 권력의 정상에까지 올랐다. 적어도 ‘한국 개혁 인물사’에서는 기적에 속하는 일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曺植)의 글에 '우음(偶吟) - 우연히 읊다'라는 시가 있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이려고 하다가
죽은 뒤에는 막 칭찬한다네.(生則欲殺之 死後方稱美)
라는 내용이다.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은 청와대.
이 싯구를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입하면 어김이 없을 듯하다.
김대중이 1993년 대선에서 세 번째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 영국유학을 떠날 때에 그에게 적대적이었거나 비우호적인 신문들까지 최상의 헌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아마 이같은 현상은 그가 사망하게 되면 재현될 지 모른다.
그는 암울했던 권위주의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했던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은 위협과 회유를 당당하게 물리친 ‘불굴의 인간’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빛나는 정치적 퇴장은 ‘민주화의 사표’로 ‘자랑스런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주석 9)
야당 지도자 김대중씨의 궤적은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제1공화국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반독재 투쟁의 상징이자 기수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제3공화국과 유신, 제5공화국 시기에 그는 박대통령과 전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탄압체제의 가장 치열한 적수였다. 71년의 선거 때 그는 박대통령으로 하여금 “더 이상 선거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만들었다. (주석 10)
이제는 모두가 그에 대해 따뜻한 박수를 보낼 시점이다. 이 땅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공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또 그는 척박한 정치풍토 속에서도 사회의 소외세력과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제도권 정치 속에 반영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큰 기여를 했다. 설사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이라도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그의 기여를 폄하해선 안될 것이다. (주석 11)
김대중의 정계은퇴에 특히 ‘기뻐 날뛴’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당시 <시사저널>의 언론인 김동선은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지난 수십 년간 김대중씨에 대해서 사사건건 배타적 입장을 취해온 한 신문은 은퇴소식을 다루면서 사설, 기자수첩, 특집, 사회면 머릿기사 등에서 기존의 배타적 입장을 버리고 대단히 우호적인 편집 태도를 보였다. 우선 이들 기사의 제목에서부터 태도 변화가 감지된다. 사설 제목은 ‘김대중씨의 기여’, 사회면 머릿기사는 ‘당도 광주도 국민도 목메인 고별’이라는 부제 밑에 ‘거인 퇴장하다’였다. ‘김대중 선생’이라는 기자 수첩(박스 기사)은 광주의 슬픈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었고, 사설이나 사회면 머릿기사 특집 등의 기사 내용은 구구절절 그의 파란 많은 정치 40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남겨 있었다.
특히 사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앞으로 평당원으로 백의종군하면서나마 그의 경륜과 통찰은 집권당과 야당 모두의 지혜를 북돋우는 자양으로 활용되어야 할 일이다. 빌리 브란트씨가 당수직을 떠난 후에도 많은 훌륭한 일을 했던 일을 상기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한마디로 김대중씨에 대한 찬사가 놀랍다. (주석 12)
<조선일보>의 이와 같은 보도ㆍ논평 행태는 ‘거인 퇴장’을 진정으로 아쉬워 해서가 아니라 ‘김대중 확인사살’(강준만 교수)이었다. 정계은퇴에 최상의 찬사를 보냄으로써 정치적으로 매장하여 다시는 복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고 집권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심기’가 어떠했겠는가. 그것은 이성도 양식도 없는 ‘김대중 죽이기’의 막된 ‘필탄’공격이었다.
특히 김대중이 집권하여 신문사 세무조사를 할 때부터는 ‘언론’이라 부르기에 낯부끄러울 정도의 ‘적대적 찌라시’였다. 공기(公器)의 기능이 사주(社主)의 사유물로 전락하는 참담한 지면이었다. 이때의 지면은 뒷날 언론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독재정권과 보수 정권에는 ‘순한 양’이었던 이들 신문들은 김대중 정부에는 ‘독한 사냥개’가 되어 사사건건 물어뜯었다. 이같은 보수 언론의 행태는 노무현 정부에도 마찬가지였고, 이명박 정부에는 다시 ‘순한 양’으로 바뀌었다.
1963년부터 1984년까지 <뉴스위크> 동경특파원을 하면서 주은래ㆍ박정희ㆍ김일성ㆍ히로히토ㆍ전두환ㆍ김영삼ㆍ김대중 등 아시아 주요 인물들을 인터뷰했던 아시아문제 전문기자 버나드 크리셔(B. Krisher)는 “김대중씨가 죽고 나면 한국인들은 그때 가서야 김대중씨에게 정말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 (주석 13)이라고 쓴 적이 있다.
김대중은 몇 차례나 운명의 끝자락까지 다녀 온 사람이다. 박정희의 납치사건과 전두환의 사형선고는 운명의 끝자락이었다. 그는 저승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생환되어 정치를 재개하고 마침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조선왕조 개국 이래 600년 동안 줄곧 보수 수구세력이 지배해 온 나라에서 1998년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정치적사건 이상의 민족사적ㆍ역사적 의미가 담긴다.
지역ㆍ국회ㆍ언론ㆍ금융ㆍ군ㆍ검찰ㆍ경찰ㆍ정보기관ㆍ대학 등 국가의 주요재원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골리앗 세력과의 싸움에서 왜소한 야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중심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8년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한국현대사에서 최초로 지배세력의 핵심이 교체되는 준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또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으로 조장한 지역차별 이래 전두환ㆍ노태우ㆍ김영삼으로 이어진 35년의 영남 집권에서 최초로 호남집권을 가져온 ‘지역평준화’사건이기도 했다.
김대중이 집권했을 때에 군사정권에서 인권탄압에 앞장섰거나 각종 비리에 깊숙이 관여했던 보수(수구) 인사들은 납작 엎드렸다. 무서운 정치보복이 따를 것으로 예측하였고, 선거 과정에서 상대 진영에서는 “김대중이 집권하면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던 터였다.
하지만 김대중은 사적인 보복의 칼을 뽑지 않았다.
IMF라는 미증유의 국난극복의 과제가 시급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반면에 위기 국면에서 정치보복이 훨씬 더 수월하다는 ‘정치공학’이 없는 바 아니었지만, 어쨌든 김대중은 정치보복의 칼을 뽑지 않았다.
www.hani.co.kr> color=#0000ff size=2>“대통령이 돼서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대했지만, 나쁜 제도는 바꿨지만 사람은 다 용서했다.” www.hani.co.kr> color=#0066cc size=3>(주석 14)
혹자는 일부 언론사의 세무조사를 들지 모른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김영삼 정부 때에 이미 세무조사를 마치고도 정략상 공개를 하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연매출이 500억 이상의 기업은 5년마다 한 번씩 세무조사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수십 년 동안 언론사들이 보수정권과 ‘권언유착’관계에서 한번도 실시하지 않는 것이 위법 상태였다. 그리고 조사대상 언론사 사주들의 횡령ㆍ탈세 등 온갖 불법 비리가 드러나고 대법원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이를 두고 정치보복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대중의 집권 초기 바짝 긴장하며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세력이 그의 다소 유약해 보이는 ‘민주주의적 접근방식’의 국정운영으로 금새 ‘종이 호랑이론’이 나오게 되고, 얼마 뒤부터 보수 수구세력은 일제히 보수수구 언론의 조명을 받으면서 김대중 정권의 ‘발목잡기’를 시작하였다.
심지어 현직 대통령으로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알려지자 “돈을 주고 상을 받는다”면서 현지에 사람을 보내 수상자 반대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자국 국민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저지하려 한 사례는 노벨상 100년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현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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