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복판에 우뚝 선 거목이었다. 정치, 경제, 남북관계, 외교 분야 등에서 그로 인해 다시 쓰여진 역사가 수두룩하다. 여야 정권교체와 남북 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에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민주와 인권, 자유, 평화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해온 점도 평가할 만하다.
한반도 서남쪽 끝의 한 작은 섬에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대권 도전 4수 만에 고희(古稀)가 넘어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그의 삶은 치열했고, 파란만장했다. 온 국민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정권 30여년간 그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했다. '행동하는 양심'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피랍과 테러, 투옥, 망명, 가택 연금 등 무수한 시련과 고초를 겪었다. 연금 때문에 아버지를 임종하지 못했다. 수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 가운데 하나인 1973년 8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돼 공해상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납치 5일 만에 서울 동교동 자택 부근 주유소 앞에서 눈과 손발이 붕대로 감긴 채 발견된 사건의 진상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치열하고 파란만장했던 '인동초'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인동초(忍冬草)라는 별칭을 얻은 것은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결코 접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국민 모두가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는 이면에는 수십 년에 걸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이 자리잡고 있다. 집권 이후에도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등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지속됐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그의 분명한 인식은 정부 명칭을 '국민의 정부'라고 결정한 데에도 나타나 있다.
인권도 그의 주 관심사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억울하게 숨진 사람들을 구제한 것과 국민기초생활법을 제정해 소외된 빈자(貧者)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설치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성부를 신설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려 애쓴 점과 집권 기간 사형수들의 사형을 한 번도 집행하지 않은 점,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은 점도 인권과 연관돼 있다.
한반도를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그의 집념은 강했다. 3단계 통일 방안을 마련하는 등 이론적으로도 완벽을 기했다. 1997년 건국 50년 만에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룬 뒤에는 햇볕정책을 펼쳤다. '대북 퍼주기'라는 비판이 있으나, 한반도 냉전 구조를 해체하고 항구적인 평화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선 햇볕정책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98년 당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가는 것을 승인한 이후 일관되게 추진한 햇볕정책의 결실은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맺어졌다. 분단 55년 만에 남북 최고 권력자가 평양에서 만나 포옹하며 공동성명을 발표한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금강산 관광의 길이 열렸고, 경의선 철도가 이어졌고, 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단이 동시 입장하기도 했다. 여야 정권 교체가 다시 이뤄진 뒤 북한의 비이성적 행태로 빛이 바랬지만 남북관계에 큰 획을 그은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역사상 첫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쾌거는 그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고, 적대적인 남북 관계를 화해 무드로 바꾼 데 대한 선물이었다. 미얀마의 민주 투사인 아웅산 수치 여사를 지원하고, 동티모르의 인권 탄압을 비판해온 점도 고려됐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상"이라는 축하 메시지가 쏟아지면서 국위가 크게 선양됐음은 물론이다.
소수파 한계 딛고 위대한 업적 남겨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선에서 승리한 그는 샴페인을 터뜨릴 겨를도 없이 당선자 시절부터 동분서주했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국가 부도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허탈하게 만든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대우그룹을 비롯한 재벌들을 구조조정했고, 노사정 대타협을 성사시켰다. 6·25 이후의 최대 국난이라는 외환위기에서 2년도 안 돼 탈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그의 지도력이 큰 몫을 했다. 국민들은 금모으기 운동으로 화답했다.
이어 산업시대를 지나 지식기반 경제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측하고,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NT(극미세기술) 등을 육성해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킨 점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치적이다.
안타까운 점도 있다. 국민적 동의 없이 북한 정권에 거액을 송금해 사법부의 심판까지 받아야 했던 점, 유난히 도덕성을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의 자식들이 비리에 연루된 점 등이 그것이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전 국민의 지도자로 추앙받지 못하고 야당의 대정부 투쟁만을 독려하는 진보진영의 정치 원로 역할에 그친 점도 마찬가지다.
그는 집권 이후 정치보복은 없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정치를 폈다. 하지만 지역·이념갈등은 완화되지 않았다. 이 점이 못내 아쉬웠던지 우리 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의 병상은 이념과 정파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통합의 장(場)이었다. 그와 반목을 거듭했던 이명박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던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이 잇따라 병원을 찾아 그와 화해하고, 그를 대신해 화합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보냈다.
그가 뿌린 씨앗, 결실은 산 자들 몫
그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여러 분야에 새로운 씨앗들을 뿌려놓았다. 그 씨앗을 잘 가꿔 알찬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은 산 자들 몫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 전 대통령을 잃은 비통한 심정 속에서도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민주주의, 인권, 자유,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지역과 이념을 기준으로 편을 갈라 죽기살기로 싸우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언제나 소수파였다. 박해의 상징이기도 했다. 평생 영일(寧日)이 없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이를 극복했다. 그리고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다. 역사는 그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도 역사가 할 것이다.
그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제 하나님 곁에서 평화롭게 안식하기를 기원한다.
- 국민일보 2009년 8월 19일 사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