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눈은 늘 젖어있는 듯 했다. YS에 패해 영국으로 떠나던 공항대합실에서도, 대통령이 된 뒤 금모으기를 벌이는 국민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때에도, 아들들의 비리에 대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할 때에도 그는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소년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심지어 김정일과 포옹을 할 때에도, TV 대담프로에 나와 조크 섞인 비유를 할 때에도, 노벨평화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발표할 때에도 그의 눈은 촉촉했다.
그는 눈물이 많은 지도자였다. 광주 망월동에서의 통곡, 노무현의 미망인을 붙잡고 터뜨리던 그의 큰 울음은 눈물을 금기시해온 한국의 남자들에겐 묘한 페이소스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눈물을 아는 지도자였다. 소외받고 핍박받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이땅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신난(辛難)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넓게는 질병과 기아, 독재에 시달리는 세계의 모든 슬픈 자들, 좁게는 남북이 갈리운 채 자식교육 하나에 매달리며 죽어라 일해온 국민들, 더 좁게는 3공화국 이래 2류 국민으로 살아온 호남 사람들의 눈물을 아는 지도자였다.
그의 눈물은 한없는 고독과 죽음에의 공포,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온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외경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인공(人共)때 총살을 면한 것이나 동경 납치사건 때 천행으로 살아난 것이나 신군부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풀려난 것들은 그를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들에 집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극단의 순간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한없는 사색, 그에 대한 대답은 결국 그의 신앙이기도 한 가톨릭의 가르침, 사랑이었을 것이다.
목포에서 태어나 자란 필자의 어린 시절 유달국민학교 운동장에선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 김대중과 공화당 후보 김병삼씨의 유세가 열렸다.
얼굴에 철망 마스크를 한 경찰들이 빙 둘러선 가운데 인산인해의 청중들이 “먹고 보자 김병삼, 찍고 보자 김대중”을 연호하던 열광적 장면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이번엔 대통령후보가 되어 목포역광장에서 연설을 하던 그의 하이톤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지금 박정희 후보 당선을 위해 억지 표를 찍어야 하는 공무원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유감이 없습니다. 다만 부정선거만은 막아주십시오…” 나는 그때 “옳소!”를 외치던 어른들의 눈이 왜 붉게 젖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평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그가 광주에 와 조선대 운동장에서 연설을 할 때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이름 석 자를 외치던 수십만 시민들, 그들과 함께 코끝이 시려오며 가슴이 먹먹하던 깊은 울림 또한 어찌 잊을 수 있을까.
5년 뒤 다시 출마한 그가 3당 합당에 밀려 또다시 패배했을 때,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새벽 요구르트를 배달하던 아낙이 말없이 철철 울던 모습은 또 어찌나 깊게 기억되던지.
필자는 이인제·이회창 후보와 함께 그가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던 때 후보 부인들을 초청한 한 대담에서 그의 부인 이희호씨가 한 말도 잊혀지지 않는다. 각자 남편자랑을 해보라는 사회자의 말에 다른 부인들은 “정의감이 강하다” “거짓말을 안 한다”는 둥 빤한 대답을 하는데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꽃과 동물을 사랑하시고…” 아마 이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가 떠난 날 전라도의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금남로의 빈 택시들은 언제나처럼 길게 늘어섰고 손님 없는 식당의 찬모는 애잔한 얼굴로 TV속보만을 하릴없이 응시했다. 뙤약볕 내리쬐는 목포의 오거리도, 동명동 선창가도 상심의 침묵만이 허공을 메웠다.
이젠 사실이 돼버린 그의 부재를 누가 그럴싸하게 논한들 귀에 들리겠는가. 육백만 전라도사람 모두가 저마다 애틋한 그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잃은 것은 대정치가도, 한 시대의 사상가도, 세계적 평화의 사도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다. 사랑할 줄을 아는 모두의 애인을 잃었다.
광주일보 조경완 편집국장 kycho@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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