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힐 사건
워커힐 사건은 무엇인가? 군사정권은 61년 9월 성동구 광장동 부지 18만 평을 수용했다. 워커힐을 짓기 위해서였다. 젼 미8군 사령관 워키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워커힐은 마땅히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떠나는 주한미군의 달러를 잡아두기 위해 구상되었다.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은 앞 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국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언론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명 유치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했으며, 그 대신 박정희가 기생 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했다.
워커힐은 공사 착공 11개월만인 62년 12월 26일 준공되었다. 63년 4월 8일 개관식엔 워커의 아들인 미8군 소속 중령 워커가 참석해 아버지를 기렸고 세계적인 재즈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도 초대되었다. 미국이 환심을 사기 위해 호텔과 함께 들어선 빌라의 이름에도 유엔군 사령관이나 미8군 사령관 이름이 붙여졌다.8)
그러나 개관 전에 중앙정보부가 공사자금 가운데 상당 부분을 횡령해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채명신에 따르면 "공사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자 중앙정보부의 담당국장은 재무부에 압력을 가해 산업은행으로 하여금 융자를 해주도록 했고, 각 군 병력 3만여 명과 4천여 대의 장비를 동원해 공사를 벌였으며, 이는 각종 법규가 무시되고 불법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시공업자와 발주자 사이에 거액의 커미션이 오갔고 건축 자재 또한 공화당사 보수 자재와 같아 온갖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9)
또 무대장치로부터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제품을 수입하면서 중앙정보부 명의의 무관세 무검사로 도입하여 150만달러의 부당이득을 취했다.10)
출처
1)채명신 <사선을 넘어 넘어;채명신 회고록>(매일경제신문사 1994, 407쪽)
2)김준하 <대통령과 장군; 윤보선 대 박정희>(나남 2002, 155쪽)
3)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김종필의 풍운>(조선일보사 1998, 196쪽)
4)김준하 위의 책 155쪽
5)이병주 <5,16 혁명 '공약(空約)'>(월간조선 1985년 5월 493-494쪽)
6)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대왕사 1993, 252쪽)
7)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김종필의 풍운>(조선일보사 1998, 196쪽)
8)손정목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워커힐 건립>(중앙일보 2003년 9월 5일 23면)
9)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매일 경제사 1994, 407-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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