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3월 26일,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졸업생들의 건강을 검진해 주는 행사가 있었다. 이때 대학 부속병원의 의사는 어느 체격이 다부진 청년에게 심장이 약하다는 진단을 했다. “앞으로 주의해야 하네. 격한 운동은 안 되고, 심한 스트레스나 격무가 따르는 직업도 가져서는 안 된다네. 물론 술이나 담배도 곤란하지. 늘 조심조심 살지 않으면 장수하기 어려울 테니, 명심하게나.” 그러나 그 청년은 싱긋 웃으며 가슴을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절대로 조심조심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장수해서 뭐합니까? 죽을 때 후회가 없도록, 하고 싶은 일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할 겁니다. 그러다 죽으면 죽는 거죠, 뭐!” 실제로 그는 평생 그런 태도로 살았다. “할 만큼 해 보다가,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뭐!” 그러나 그런 식으로 그가 어느 자리까지 올라가고, 어떤 일들을 하게 될지, 미리 알았다면 그 대담한 청년도 놀랐을 것이다. 그가 시어도어 루스벨트였다.
남북전쟁(1861~1865)은 수없이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가져온 비극이었으나, 이로써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라는 독립 이래 미국의 해묵은 골칫거리는 마침내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후 미국은 놀랄 만한 경제부흥을 이룩하여, 1900년 당시 공업 총생산액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액수를 넘어서며 19세기의 영국을 대신해서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당시 세계 공산품의 약 절반은 미국제였으며, 면화, 철, 석유 등의 중요 1차 생산물 생산량 역시 세계 생산량의 삼분의 일에 달했다. 당시의 유럽이 “세기말”의 쇠퇴와 불안을 이야기하는 동안, 미국의 성장은 20세기가 ‘미국의 세기’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이런 유례없는 경제성장은 거대기업들의 등장 역시 불러왔다. 석유업의 록펠러, 철강업의 카네기, 금융업의 모건, 철도업의 밴더빌트, 굴드 등은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당대에 재벌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들의 힘은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뒤흔들었다.
소득세도 없고(1862년, 링컨이 최초의 소득세법을 만들었으나 남북전쟁 당시의 임시적인 것으로 그쳤다), 독점제한법도 없고, 노동3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던 당시는 부자들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 등 소외되는 계층이 있음을 의미했다. 록펠러나 카네기 등의 자선사업이 있기는 했어도 재벌은 대부분 안하무인이었으며, “강도 귀족”이라는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무분별한 개발에 따른 환경파괴 역시 문제였다. 따라서 20세기에 접어들던 미국의 과제는 경제성장의 그늘인 경제력집중과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거대해진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과제를 위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총대를 맨 정치인이 바로 루스벨트였다. 병약한 ‘도련님’의 변신 제32대 대통령이 될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먼 친척 뻘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루스벨트 가문은 19세기 들어 무역업과 금융업 등으로 상당한 부를 쌓았다. 그런데 어린 루스벨트는 유달리 병약한 아이였다. 천식이 떠나지 않았고 걸핏하면 열이 나서 드러눕곤 했다.
그래도 성격은 쾌활하고 호기심이 많았는데, 건강 때문에 직접 모험을 할 수 없는 이상 여러 동물이나 곤충의 박제, 표본 등을 수집하고 책을 통해 세상의 신기함을 최대한 접하려고 했다. 그는 이른바 신동은 아니었으나 두뇌가 매우 명석하고 특히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서 한 번 읽은 책은 그대로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잣집 특유의 영재교육으로 그런 재능은 유감없이 계발되었고, 어렵지 않게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병약함을 견딜 수 없었고, 꾸준한 운동과 체력단련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했다. 그래서 하버드에 입학할 무렵에는 건장한 ‘몸짱’으로 거듭나 있었으며, 대학 권투 클럽에 들어 아마추어 선수로 뛰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무리를 한 결과 졸업 무렵의 건강진단에서는 “심장이 너무 약해져서 정상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루스벨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생 남몰래 건강 문제를 갖고 있었으나, 늘 호탕하고 씩씩한 모습을 남들에게나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며 살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은 앨리스 리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루스벨트의 열렬한 구애를 냉담하게 물리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도 루스벨트 특유의 집념과 저돌성을 당하지는 못했고, 스무 번 찍히고 넘어갔다. 두 사람은 1880년에 결혼했으며, 그들의 행복은 4년 뒤에 첫 아이를 낳으며 절정에 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앨리스는 아이를 낳자마자 장티푸스로 숨졌으며, 그 직전에 루스벨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루스벨트는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의 주검을 몇 시간 사이로 안아야 했다. “내 인생에서 빛은 사라졌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으나, 슬픔에 못 이겨 무너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극복 가능한 고난이라면 아무리 성공 가능성이 낮아도 부딪치고, 극복이 불가능하다면 깨끗이 잊는 것, 그것이 그의 인생 철학이었다. 루스벨트는 2년 뒤, 어릴 때 친구인 에디스 캐로우와 재혼했다. 루스벨트는 하버드 졸업 후 콜롬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했으나, 1881년에 뉴욕 주의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중퇴, 이로써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공화당 소속의원으로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인 블레인을 지지하지 않는 ‘머그웜프’ 활동을 했다가 당의 질시를 받으며 물러난 뒤, 한때 정계를 떠나 목장 경영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역시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었던지 다시 뉴욕 주의원이 되고,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가, 뉴욕 경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의 소소한 정치 경험을 하던 끝에 1897년에 해군부 차관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 자신을 뚜렷이 어필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대학생 시절부터 국방 문제에 관심이 컸고, 재학 내내 연구하여 졸업 직후 펴낸 [1812년의 해전]은 오랫동안 해군 관련서로서 고전이 될 만큼 잘 짜여져 있었다. 1890년에 나온 알프레드 마한의 [해군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도 깊이 공감했던 그는 미국이 해양세력으로 거듭나야 번영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세계 굴지의 경제력에 비해 형편없는 해군력을 늘 개탄해왔다. 그래서 해군부 차관이 되자마자 해군력 증강에 온 힘을 쏟았으며, 그 밖에도 비행기를 개발해야 한다, 하와이를 병합해야 한다, 남아메리카에 대서양-태평양을 잇는 운하를 건설해야 한다 등의 과감한 주장을 거듭, 매킨리 대통령과 헤이 국무장관 등을 골치 아프게 했다.
이로써 워싱턴 정가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어필한 루스벨트는 1898년에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적으로도 주목 받을 기회를 얻는다. 해군부 차관을 사임하고는 “러프 라이더”라 불리는 자원병 연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것이다. 러프 라이더는 쿠바의 산 후안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로써 국가적 영웅이 되어 그 후광으로 뉴욕 주지사에 선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머그웜프 활동 이래로 공화당 간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루스벨트는 “그를 정계에서 퇴출시키려는 음모”에 빠지고 마는데, 바로 1900년의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는 매킨리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부통령이 인기 없는 직책이었다. 실권이 거의 없는 명예직이면서도 정치경력의 최종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못해 부통령 후보가 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끝난 뒤에는 대학 강사 자리나 알아봐야겠다”고 푸념했으나, 꿈에도 상상 못한 일이 벌어진다. 1901년 9월 14일, 매킨리 대통령이 버팔로에서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되고,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이다. 강도귀족들과의 싸움 당시의 대표적 재벌 중 하나였던 J. P. 모건은 매킨리의 암살 소식을 듣고 “이렇게 슬픈 소식은 처음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매킨리는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검은 돈을 받고 재벌에게 유리한 법안을 만들어 주는 정경유착을 조장함으로써 미국 사상 부자들에게 가장 좋은 시대였던 당시의 분위기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새로 대통령이 됨으로써 분위기는 일변한다. 그는 뉴욕 주지사 때부터 독점기업들에게 세금을 신설하는 등 ‘반재벌’ 정책을 펴왔고, 취임 직후에도 “우리는 재산권은 존중하지만 부패는 존중하지 않는다”며 ‘강도귀족’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래도 워낙 막강한 재벌의 힘을 연방정부의 권력을 경계하는 전통이 있는 미국의 대통령 혼자서 제재하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워싱턴에서 재벌의 검은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라, 개혁의 추진 세력을 모으기도 힘들었다. 사실 루스벨트 자신도 1904년의 재선 과정에서 검은 돈을 받았는데, 이는 “관계자가 받았을 뿐이지 루스벨트 본인은 몰랐다”는 식으로 발뺌 처리되었지만 재벌들 입장에서는 엄연히 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재선에 성공한 루스벨트가 더욱 강력한 재벌 규제 정책을 밀어붙이자, 강철왕으로 불리던 헨리 프릭은 격분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우리가 저 개XX에게 먹이를 주었는데, 저놈은 우리 손을 무는구먼!”
루스벨트의 원군은 언론이었다. 당시 언론 중에는 사회적 추문을 들춰내 선정적 기사를 싣는 언론이 많았는데, 루스벨트는 이들을 경멸하며 “거름더미 뒤지는 자들(muckraker)”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들이 재벌의 치부를 들춰내고 널리 퍼뜨림으로써 국민 여론을 움직이게 된다. 특히 아이다 타벨이 1902년부터 <맥클루어> 지에 연재한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는 록펠러가 어떻게 그 어마어마한 부를 이룩했는지,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지저분함과 잔인함이 있었는지 속속들이 파헤침으로써 국민의 반재벌 의식 형성에 크게 한 몫했다.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 역시 식육업체들의 비리와 비위생적인 정육 과정을 고발하여 충격을 주었다. 루스벨트는 재벌의 리베이트 관행을 저지하는 엘킨스법(1903), 철도회사 운임의 독점적 형성을 막는 헵번법(1906), 식육업체를 비롯한 식품재벌들의 비리를 차단하는 육류검사법 및 식품의약규제법(1906) 등을 입법했고, 1902년에는 무연탄 광산의 파업에 개입해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재벌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1890년에 제정되었으나 잠자고 있던 셔먼법에 근거하여 노던 증권, 모건 철강, 스탠더드 오일 등의 트러스트들을 상대로 45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중 가장 주목 받은 소송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이어진 스탠더드 오일 상대의 소송전이었다. 이는 당시 최대의 트러스트를 해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미국 기업 역사에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록펠러를 비롯한 당사자들은 그리 슬퍼하지 않았는데, 기존 지분이 인정되고 보상이 주어짐으로써 대주주들은 일확천금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러스트 자체는 39개로 해체되었으며, ‘기업연합을 통해 하나의 기업 또는 경영자가 동종업계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굳어져서 이후 트러스트들의 연속 해체를 가져왔다. 재벌과의 싸움은 루스벨트 행정부의 확고한 의지, 언론이 일으킨 국민의 반재벌 정서, 그리고 기득권자들이 나름대로 대가를 챙길 수 있는 출구의 마련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환경보호의 역사에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1902년에 크레이터 국립공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임기 중에 국립공원 수를 두 배로 늘렸으며, 1903년에는 루이지애나 주의 펠리컨 섬을 미국 최초의 조류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임기 중에 총 51개의 보호구역을 지정했다. 또 산림청을 신설하고 유명한 자연보호운동가인 기포드 핀초를 청장에 앉혔다. 이후 산림보호구역은 루스벨트 이전보다 약 5배로 늘었다. 1908년에는 천연자원 보호안을 만들었으며 이듬해에는 백악관에서 북미 환경보호회의를 개최했다. 환경에 대한 그의 생각은 대체로 중요한 자원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제중심적인 사상에 기울었으나, 환경 그 자체를 보존해야 옳다는 이상주의에도 열려 있었다. 하지만 가장 루스벨트다운 정책은 대외 정책에서 나타났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먼로 독트린을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아메리카는 아메리카다’라고 요약할 수 있는 미국의 전통적 외교 방침인 먼로 독트린은 유럽의 국제정치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고립주의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아메리카에서 모든 유럽 세력을 몰아낸다”는 노선, 달리 말하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만이 패권을 떨쳐야 한다는 노선으로 재천명했다.
이를 실천에 옮긴 그는 독일과 베네수엘라의 분쟁에 개입하고, 산토도밍고(오늘날의 도미니카)에 간섭했다. 그리고 여러 남미 국가들이 유럽 국가들에게 진 부채 때문에 그들의 개입을 초래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미국이 대신 빚을 갚아 준다는 정책을 취했다. 루스벨트는 이런 정책을 수행할 때 “부드러운 말과 큰 곤봉”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를 빗대어 그의 외교를 “곤봉 외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1906년에는 그 동안 공들여 증강한 해군력을 과시하고자 ‘그레이트 화이트 함대’에게 세계를 일주하게 하는 퍼포먼스도 연출했다. 루스벨트가 대외적으로 가장 공들인 사업은 파나마 운하 건설이었다. 그가 대학생 시절부터 꿈꿔온 이 사업은 본래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의 레셉스가 시작했으나, 여러 비리 의혹에 휘말리면서 자금난에 부딪쳐 공사가 중단된 것을 루스벨트가 끼어들어 프랑스 회사에 거액의 보상금을 주고는 공사권을 따냈다. 하지만 당시 파나마 지협을 영토로 보유하고 있던 콜롬비아가 미국에 비협조적이어서 벽에 부딪쳤는데, 루스벨트는 “국가 하나를 창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암암리에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독립하도록 후원하고, 앞서 부설했던 파나마 철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대함대를 파견해 콜롬비아를 굴복시킨 것이다. 신생 파나마 정부는 막대한 자금 지원과 군사보호를 내건 미국에게 파나마 운하 건설, 운영, 보호권을 부여한다는 협정에 독립 2주일 만에 서명했다(1903). 이로써 미국은 멀리 남아메리카 남단까지 돌아가며 유럽과 교통할 필요가 없어졌고, 태평양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에서 점점 중요해지던 시점에서 그 중요한 관문을 손에 넣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아메리카와 직접 관계가 없는 국제문제에도 개입하여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1905년 3월에는 프랑스와 독일을 중재해 모로코 분쟁을 해결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러-일 전쟁 해결의 중재역을 맡았다. 연패의 늪에 빠진 러시아와 국력의 한계에 도달한 일본은 전쟁을 유리하게 끝낼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루스벨트는 두 나라의 대표를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모이게 하여 협상 타결을 권고했다. 조선을 일본이 차지한다는 건은 러시아가 선선히 받아들였지만 사할린 귀속 문제와 배상금 문제 때문에 난항을 거듭했는데, 루스벨트가 “일본은 사할린의 절반만 갖고, 배상금은 포기하라”고 종용함으로써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1905년 9월). 이로써 루스벨트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보다 두 달 전인 7월, 루스벨트는 육군장관 태프트를 도쿄로 보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기로 협의한 뒤였다. “조선이 제3국의 침략을 받으면 미국은 즉각 개입한다”는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규를 일방적으로 깨트린 것이다. 당시 루스벨트와 미국은 “세계평화의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지만, 그 평화란 약소국의 입장을 힘의 논리로 짓밟으며 이루어진 것이었고, 루스벨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 누구보다도 그런 힘의 논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1909년에 대통령에서 물러난 루스벨트는 태프트를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지만, 나중에는 태프트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래서 그 다음, 1912년의 선거에서는 태프트의 재선을 돕기를 거부하고 공화당을 탈당, 진보당을 결성해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이는 공화당 표를 둘로 가름으로써, 루스벨트가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에게 제28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어부지리를 안겨주었다. 이 때 루스벨트는 밀워키 유세에서 총에 맞고도 끝까지 연설을 강행하는 투혼을 보여주었으나, 결국 민주당 좋은 일만 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늙은 ‘야인’ 루스벨트는 저술 활동에도 힘을 쏟고(그는 평생 30여권의 책을 썼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을 두루 탐험했다. 브라질에서는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기며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강을 탐사, 그 강에 “테오도어 강”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끔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스페인 전쟁 때처럼 지휘관으로 참전하겠다고 했으나 윌슨 행정부의 반대로 뜻을 못 이루자, 대신 자식들을 참전시켰다. 그 중 막내아들 쿠엔틴은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이는 이미 육체적으로 충분히 쇠약해졌던 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6주 만에 귀가했으나, 휠체어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갈 꿈을 꾸었으며,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19년 1월 6일, 그날도 몇 편의 글을 쓰고는, 자리에 눕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오늘날 테디 루스벨트는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에서, “테디 베어(그가 곰 사냥을 나갔다가 잡은 새끼곰을 불쌍히 여겨 놔주었다는 일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에서, [박물관이 살아 있다] 같은 영화에서 여전히 미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분명 최선을 다해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식견과 추진력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격을 한 단계, 또는 그 이상 올려놓았다. 하지만 강자의 이야기만이 본받을 만한 이야기가 되고, 승리자가 남긴 전설만이 전설이 되는 세상이란, 진실로 극복할 수 없는 이치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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