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왜군들의 전투력은 당대 최강이였다는 평가도 꽤 존재 합니다.
지방토호들이 난무 하던 전국시대가 종식 되기까지 거의 백년가까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다 보니,
개개병사의 전투력은 만렙이고 봐야 할 정도 입니다.
임진왜란의 초기패배가 조총에 의한것이라고 하지만, 왜군의 전체의 조총병 비중은 최대 30% 넘지 않았고,
임진왜란 초기에는 17%~20% 비중 이였습니다. 나머지는 창병 과 궁병, 그리고 검수로 이루어 졌습니다.
조총도 일본에서도 꽤나 고가의 무기에 속합니다...특히 왜군하면 생각나는 일본도의 경우는 아예 전투용이
이라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 힙니다....전장에서 일본도 한자루를 얻으면 팔자 핀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입니다.
창 만해도 조선군의 보유한 창보다 훨씬 길었고, 임진왜란 전 대마도주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어떤 고을에
사열 했있던, 군사의 창을 보고, 우리군의 창은 이 창보다 훨씬더 긴데 이것 가지고 싸움을 하겠소 하고
이야기 합니다.....이말은 비웃게 아니라, 전쟁을 어떻게하든 피하고자 했던 대마도주가 우리에게 넌지시 왜군의 정보를 알려주는거고, 대마도주는 계속하여 이런식으로 정보를 흘리는데도, 우리는 미개한 왜인의 말이라고 귀담아 듯지 않죠.
이순신 장군 조차 단접병전을 피하고 할 정도로 일군의 전투력은 만렙이였죠.
근데 왜군하면 조총으로 이어지냐면, 2차대전 독일군의 주요무장은 Kar98K 입니다, 근데 드라마 영화등을
보면 Kar98K 보다는 MP40이 독일군의 대명사 처럼 보이게 합니다.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 역시 왜군과 다름 없는 아르케부스가 주력이였고, 총병의 비율 역시 왜군과
비슷한 수준 이였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프린트락 의 머스킷총은 30년전쟁을 거치면서 17세기에 와서나 주력이 됩니다.
1590년대 유럽의 상비군을 보면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몇만단위에 상비군 체계 였습니다.
흔히 아는 10만 단위의 병력 대 병력이 붙는 전투는 나폴레옹 시대 부터 시작이 됩니다.
근데 같은 시기의 왜군의 10만이 넘는 원정군을 보내고, 본토에는 그 만틈의 병력이 상주 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합쳐져서,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의 당대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집단으로 보는 경우가
꽤나 있습니다.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조선 정부는 굉장히 민첩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경상 좌수영 내 7개 진포가 동래-부산진 방면으로 전면 재배치되고 전란 발생 시 각 군현 부대의 집결지 설정과 그 임무까지 세밀하게 짜여져있습니다.
상고와 고려시대 역사를 참조하여 하삼도에서 2만여명의 왜구를 막기위한 제승방략 계획이 수립됐고, 잘 발동됐습니다.
초기 전투에도 조총에 혼비백산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첨절제사 정발이 바로 조정에 파발하고, 부산진성에서 정군 527명과 의병 포함 총 1천여명 전원이 무기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 싸우다 전사하셨습니다.
그 분들께서 목숨으로 8만명의 병력을 모을 시간을 벌어주셨고,
백성들까지 장렬히 전사하는 장면을 목도한 일본군은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지 조선 개국이래 200여년간 전쟁을 치룬 적이 없었고,
유사이래 왜구가 2만이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PC견적구매 초전의 패배는 조선 정부의 위기대응능력 과 정보수집이 개판 오분전 이였기 때문 입니다.
전장에서는 10만이 넘는 왜병이라는 보고가 속속히 올라오는데, 조선정부는 그걸 믿지 않았죠.
님이 이야기 하신대로 최대 2만이라고 보는 최악의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 실수가 임진강 전투의 패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무관이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면 역모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임진간 방어선의 총수가 있는대도
불구하고, 문관 출신이 또 보내 총수 역활을 하게 되면 지휘권 이원화가 됩니다.
여기에 급작스럽게 한양을 버리고, 도주 햇다는 창피함 과 최대 2만이라함도 오판도 모잘라,
전투에 닳고 닳은 일본 정규군이 아니라 규모가 큰 왜구라 파악이 겹쳐져, 무리한 공격 주문으로 인해
결국 임진강 전투에 어이없게 패배.....평양까지 일사천리로 뚫리게 됩니다.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병력은 조선이 가진 최고의 지상군인 북변을 지키던 군이였고,
긴급 소집령으로 인해 북변에서 속속히 개별단위로 부대단위로 남하 하고 있는 중이였습니다.
거기에 남쪽에서는 삼도 근왕군 5만이 소집 되어 북상 하고 있었고, 계획만 잘만 짜면 망치 와 모루 역활을해
일전을 치르고 승리까지 바라 볼수 있는 상황 이였죠.
근데 앞서 이야기한 적정 파악 미숙 과 도성을 되찾아야 하는 조급함, 무관들에 대한 불신임으 합쳐져서
그걸 기다리기 못하고, 독촉 임진강 방어선을 그대로 뚫려 버리고,
적정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왕명에 의해 재촉 의 재촉으로 급하게 진군 하여,고작 5,000 왜군에 대패 하여
해산이 되어 버립니다.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하고, 위기대응능력이 떨어졌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극적인 전투 였습니다.
조선군이 왜 박살이 났냐? 쉽게 설명 하면, 불패의 조선수군 전체가 단지 지휘관 하나 바뀌었을뿐 이였는데
전멸 한걸 생각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활은 상당한 숙련기간이 필요하며, 보통은 25발 정도 연사를 하면 팔 힘이 떨어지면서 위력이
점점 반감이 된다고 합니다....기병들 보면 활통 크기에 비해 활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겁니다.
조총의 최대의 장점은 활에 비해 최단기간내에 쓸만한 보병으로 양성 할수 있으면, 그 보병이 몇년은 공을
들여하는 중기병,궁병,검수들을 쉽게 죽일수 있다는게 최대 장점 입니다.
조총이 국내에 진상 되었을때, 우리는 조총의 단점만 보았습니다....다음사격까지 텀 시간이 길며, 그동안에
활은 2~3발는 더 쏜다는 점이 부각 되어, 그냥 그저그런 공물로 본것죠.
어차피 더 위력이 좋은 승자총통이라는 개인화기도 보유하고 있던 차에, 승자총통에 비해 다루기 쉽고,
조준이 쉽다는걸 간과 하게 됩니다.
분명 대마도주 와 통신사, 첩보 통해 충분한 정보가 전해졌음에도 불구 단순히 미개한 왜 하는 편협한 생각에
빠져 제대로 얻어 맞게 되는 겁니다.
선조가 만약 이순신이라는 사람은 무리수를 두어 전라좌수사를 만들지 않고, 변방이나 지역고을 수령정도로
만 남겨놨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 과는 전혀 달라 졌을 껍니다.
영화에서 보는것과 같이 화살 한발로 사람이 바로 무력화 되진 않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날라오는 화살은 보고 피하거나 막을수가 있죠. 그런데 조총은 한방에 치명상을 입고 무력화가 될 확율이 크죠 그게 임진왜란때 조선군이 간과했던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왜란때 왜군의 편제가 조총만 있는줄 아시는 분이 많은데..
강력한 장창부대가 있었습니다. 장창부대를 선봉으로 조총부대가 근접 지원을 하기 때문에 밀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활을 제대로 쏘려면 몆년씩 훈련받아야되고
조총은 하루훈련받으면 쏠수있구
이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죠
오죽했음
농민출신 병사들은
평소에쓰던
도리께에 쇠뭉둥이 메달아서
쥐어주니
적진에서 날아다니며 왜놈들
뚝배기날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익숙한 무기,익숙하지 않은 무기의
차이는 큽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아시아 최고 육군부대와 아시아 최고 수군부대가 싸운 전쟁입니다.
왜군이 오판한것이 있다면 빠른속도로 한양만 점령하고, 선조의 항복을 받으면 위에 남아있는 육군이던, 조선수군이던 몽땅 무릎꿇고 항복할줄 알았다는 것이죠....
성문은 열려 있고, 선조는 북으로 ...또 북으로 갈줄은 몰랐던거고, 땅에서 단병접전으로 최강이라고 생각하다가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개털리니깐 아 이게 아닌데 하고 교착된거죠....
전선을 길어지고, 보급은 딸리고, 전라 좌수영, 우수영에만 활보해야할 수군이 조금씩 아무지게 일본수군을 깨버리고 우측으로 우측으로 와서 쓰시마까지 바라보니 더 올수가 없고.... 미쳐버릴 지경이였을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력 무기가 화살이고 주요 전략은 방어전인 이유입니다. 근접전을 할수 있는 조선군이 전무한 실정이였죠.
지구최강이 아니고 동아시아 최강쯤 될거 같아요. 16세기엔. 아무래도 유럽이 최강이였습니다. 머스킷총병과 기마 피스톨 군인도 있을때니까요.
지방토호들이 난무 하던 전국시대가 종식 되기까지 거의 백년가까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다 보니,
개개병사의 전투력은 만렙이고 봐야 할 정도 입니다.
임진왜란의 초기패배가 조총에 의한것이라고 하지만, 왜군의 전체의 조총병 비중은 최대 30% 넘지 않았고,
임진왜란 초기에는 17%~20% 비중 이였습니다. 나머지는 창병 과 궁병, 그리고 검수로 이루어 졌습니다.
조총도 일본에서도 꽤나 고가의 무기에 속합니다...특히 왜군하면 생각나는 일본도의 경우는 아예 전투용이
이라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 힙니다....전장에서 일본도 한자루를 얻으면 팔자 핀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입니다.
창 만해도 조선군의 보유한 창보다 훨씬 길었고, 임진왜란 전 대마도주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어떤 고을에
사열 했있던, 군사의 창을 보고, 우리군의 창은 이 창보다 훨씬더 긴데 이것 가지고 싸움을 하겠소 하고
이야기 합니다.....이말은 비웃게 아니라, 전쟁을 어떻게하든 피하고자 했던 대마도주가 우리에게 넌지시 왜군의 정보를 알려주는거고, 대마도주는 계속하여 이런식으로 정보를 흘리는데도, 우리는 미개한 왜인의 말이라고 귀담아 듯지 않죠.
이순신 장군 조차 단접병전을 피하고 할 정도로 일군의 전투력은 만렙이였죠.
근데 왜군하면 조총으로 이어지냐면, 2차대전 독일군의 주요무장은 Kar98K 입니다, 근데 드라마 영화등을
보면 Kar98K 보다는 MP40이 독일군의 대명사 처럼 보이게 합니다.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 역시 왜군과 다름 없는 아르케부스가 주력이였고, 총병의 비율 역시 왜군과
비슷한 수준 이였습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프린트락 의 머스킷총은 30년전쟁을 거치면서 17세기에 와서나 주력이 됩니다.
1590년대 유럽의 상비군을 보면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몇만단위에 상비군 체계 였습니다.
흔히 아는 10만 단위의 병력 대 병력이 붙는 전투는 나폴레옹 시대 부터 시작이 됩니다.
근데 같은 시기의 왜군의 10만이 넘는 원정군을 보내고, 본토에는 그 만틈의 병력이 상주 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합쳐져서,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의 당대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집단으로 보는 경우가
꽤나 있습니다.
경상 좌수영 내 7개 진포가 동래-부산진 방면으로 전면 재배치되고 전란 발생 시 각 군현 부대의 집결지 설정과 그 임무까지 세밀하게 짜여져있습니다.
상고와 고려시대 역사를 참조하여 하삼도에서 2만여명의 왜구를 막기위한 제승방략 계획이 수립됐고, 잘 발동됐습니다.
초기 전투에도 조총에 혼비백산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첨절제사 정발이 바로 조정에 파발하고, 부산진성에서 정군 527명과 의병 포함 총 1천여명 전원이 무기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 싸우다 전사하셨습니다.
그 분들께서 목숨으로 8만명의 병력을 모을 시간을 벌어주셨고,
백성들까지 장렬히 전사하는 장면을 목도한 일본군은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지 조선 개국이래 200여년간 전쟁을 치룬 적이 없었고,
유사이래 왜구가 2만이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잘한 건 잘했다고 하고, 못한 건 못했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장에서는 10만이 넘는 왜병이라는 보고가 속속히 올라오는데, 조선정부는 그걸 믿지 않았죠.
님이 이야기 하신대로 최대 2만이라고 보는 최악의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 실수가 임진강 전투의 패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무관이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면 역모의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임진간 방어선의 총수가 있는대도
불구하고, 문관 출신이 또 보내 총수 역활을 하게 되면 지휘권 이원화가 됩니다.
여기에 급작스럽게 한양을 버리고, 도주 햇다는 창피함 과 최대 2만이라함도 오판도 모잘라,
전투에 닳고 닳은 일본 정규군이 아니라 규모가 큰 왜구라 파악이 겹쳐져, 무리한 공격 주문으로 인해
결국 임진강 전투에 어이없게 패배.....평양까지 일사천리로 뚫리게 됩니다.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병력은 조선이 가진 최고의 지상군인 북변을 지키던 군이였고,
긴급 소집령으로 인해 북변에서 속속히 개별단위로 부대단위로 남하 하고 있는 중이였습니다.
거기에 남쪽에서는 삼도 근왕군 5만이 소집 되어 북상 하고 있었고, 계획만 잘만 짜면 망치 와 모루 역활을해
일전을 치르고 승리까지 바라 볼수 있는 상황 이였죠.
근데 앞서 이야기한 적정 파악 미숙 과 도성을 되찾아야 하는 조급함, 무관들에 대한 불신임으 합쳐져서
그걸 기다리기 못하고, 독촉 임진강 방어선을 그대로 뚫려 버리고,
적정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왕명에 의해 재촉 의 재촉으로 급하게 진군 하여,고작 5,000 왜군에 대패 하여
해산이 되어 버립니다.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하고, 위기대응능력이 떨어졌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극적인 전투 였습니다.
전멸 한걸 생각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활은 상당한 숙련기간이 필요하며, 보통은 25발 정도 연사를 하면 팔 힘이 떨어지면서 위력이
점점 반감이 된다고 합니다....기병들 보면 활통 크기에 비해 활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가 있는 겁니다.
조총의 최대의 장점은 활에 비해 최단기간내에 쓸만한 보병으로 양성 할수 있으면, 그 보병이 몇년은 공을
들여하는 중기병,궁병,검수들을 쉽게 죽일수 있다는게 최대 장점 입니다.
조총이 국내에 진상 되었을때, 우리는 조총의 단점만 보았습니다....다음사격까지 텀 시간이 길며, 그동안에
활은 2~3발는 더 쏜다는 점이 부각 되어, 그냥 그저그런 공물로 본것죠.
어차피 더 위력이 좋은 승자총통이라는 개인화기도 보유하고 있던 차에, 승자총통에 비해 다루기 쉽고,
조준이 쉽다는걸 간과 하게 됩니다.
분명 대마도주 와 통신사, 첩보 통해 충분한 정보가 전해졌음에도 불구 단순히 미개한 왜 하는 편협한 생각에
빠져 제대로 얻어 맞게 되는 겁니다.
선조가 만약 이순신이라는 사람은 무리수를 두어 전라좌수사를 만들지 않고, 변방이나 지역고을 수령정도로
만 남겨놨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 과는 전혀 달라 졌을 껍니다.
강력한 장창부대가 있었습니다. 장창부대를 선봉으로 조총부대가 근접 지원을 하기 때문에 밀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총은 하루훈련받으면 쏠수있구
이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죠
오죽했음
농민출신 병사들은
평소에쓰던
도리께에 쇠뭉둥이 메달아서
쥐어주니
적진에서 날아다니며 왜놈들
뚝배기날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익숙한 무기,익숙하지 않은 무기의
차이는 큽니다
딱 선수출신이고
그에 반해 조선군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것이죠
왜군이 오판한것이 있다면 빠른속도로 한양만 점령하고, 선조의 항복을 받으면 위에 남아있는 육군이던, 조선수군이던 몽땅 무릎꿇고 항복할줄 알았다는 것이죠....
성문은 열려 있고, 선조는 북으로 ...또 북으로 갈줄은 몰랐던거고, 땅에서 단병접전으로 최강이라고 생각하다가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개털리니깐 아 이게 아닌데 하고 교착된거죠....
전선을 길어지고, 보급은 딸리고, 전라 좌수영, 우수영에만 활보해야할 수군이 조금씩 아무지게 일본수군을 깨버리고 우측으로 우측으로 와서 쓰시마까지 바라보니 더 올수가 없고.... 미쳐버릴 지경이였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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