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strepublicain.fr="" edition-belfort-hericourt-montbeliard="" 2020="" 05="" 19="" pour-le-remercier-de-son-aide-pendant-la-guerre-la-coree-envoie-des-masques-a-un-veteran"="" target="_blank" style="text-size-adjust: none; margin: 0px; padding: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image: initial; background-position: initial; background-size: initial; background-repeat: initial; background-attachment: initial; background-origin: initial; background-clip: initial; color: #9294a4; word-break: break-all;">https://www.estrepublicain.fr/edition-belfort-hericourt-montbeliard/2020/05/19/pour-le-remercier-de-son-aide-pendant-la-guerre-la-coree-envoie-des-masques-a-un-veteran
전쟁시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기 위해 한국이 참전용사에게 마스크를 보내다
4월 말, 1950년대에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한 덩주떵(*테리투아르 드 벨포흐 주에 위치한 꼬뮌) 주민은 한국 대사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편지의) 목적은 그의 건강 상태를 묻기 위함이었는데, 무엇보다도 특히 감사의 표시로 마스크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곧 88세를 앞뒀으며 배우자를 잃은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은 미셸 오즈왈드는 위생 지침들을 철저히 준수한다. 그럼에도 "노인요양시설에서 죽어가는 그 모든 노인들"을 볼 때면 그도 불평을 자제할 수가 없다. 그에겐 그만의 의견이 있고, 이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에겐 책임의식이 있다. 그건 그가 1985년까지 군에 복무하며 배운 것이다. 비참했던 젊은 시절 도피성으로 입대하면서 18세에 군 경력을 시작한 그는 가는 곳마다 거부 당하던 위탁 아동이었다.
한국 전선에서의 2년
1951년 그는 한국행 배를 탔다. 공산주의인 북쪽과 유엔의 지원을 받는 남쪽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는 중이었다. 미셸 오즈왈드는 3,000명 이상의 프랑스 병사들로 구성된 유엔의 전투부대에 속해 있었다. "저는 젊은 중사였고, 죽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 삶은 제게 대단한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죠."라고 덩주떵의 작은 집에서 (기자를) 맞이한 80대 노인은 회상했다.
"때로 극심한 추위"(를 견디며) 전선에서 2년을 보낸 후 미셸 오즈왈드가 상사가 되어 한국을 떠났을 때 그는 고작 20세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그는 먼 기억들을 뚜렷하게 간직해왔다. (그로부터) 반세기 이상이 지났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잊지 않았다. 실제로 매년 미셸 오즈왈드는 초콜릿을 한 상자씩 받아왔다. 그는 심지어 두 번이나 한국에 초대되었고, 소요된 모든 경비는 제해졌다. 작년에 현지 보도를 위해 한국 방송사에서 찾아왔던 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죠“
그리고 4월 말 우편물을 확인하던 이 덩주떵 주민은 한국 대사가 보낸 “이 아름다운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최종문은 “우리 정부는 이 어려운 시기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썼다. 따라서 대한민국을 대표해 최 대사는 모든 재향 군인에게 5장의 수술용 마스크를 제공한다. 프랑스 전역 뿐만이 아니라 벨기에와 같은 다른 국가들에도.
미셸 오즈왈드는 그런 수혜자들 중 한 명이다. “이건 엄청나요. 저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감동 받았어요. 이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위해 싸워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주고 있고, 그건 이례적인 일이에요”라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인생 초반에 그토록 자주 부인 당했던 (사회로부터의)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일화를 읽고서 미소를 짓든 치를 떨든 그건 당신의 선택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주(*덩주떵이 속한 테리투아르 드 벨포흐 주를 말함)에서 마스크를 배포하기 전에 한국의 마스크들이 이 참전용사 앞으로 도착했다고 전한다. 그 사이엔 약 10,000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다.
편지를 보내는 김에 마스크 소량을 동봉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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