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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 군사/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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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09:40 답글 신고
    임진왜란 중 선조의 희대의 뻘짓은 바로 임진강 전투 입니다.
    여기서 조선이 가진 최고의 지상 전투병력인 북변의 군대를 이용 모루로 이용하고, 삼도에 결집도 5만의 근왕군을 망치 삼아
    제대로 지휘만 했었어도, 임진강에서 왜군을 막아 낼수 있었습니다.

    몽진이라는 국가의 최대의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는 야전사령관이 최대 무력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역모를 두려워 하게 되고, 문관 출신을 다시 야전사령관으로 내려 보내는 지휘권의 이원화.

    그리고 10만이 넘는 일본의 정규군이 상륙하여 본격적인 침공을 하여 도성을 힘없이 내준 상황에서도, 최대 2만 병력의정규군이 아닌 왜구로 판단하는 정보력 부재 과 그 와중에도 자신의 당파의 이익을 챙기려는 조정 중신들.
    한마디로 국가위기관리시스템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런 왜구무리에 힘없이 도성을 내줫다는 수치감에 의해, 임진강 방어군 과 구원하러 오는 근왕군을 계속 닥달하여,가뜩이나 지휘권 이원화로 망쪼가 들고 있는 임진강 방어군 과 근왕군이 힘없이 한타에 날려 버리게 됩니다.

    왜군의 쾌속진군으로 천혜의 방어선인 하천인 임진강을 방어선을 삼아, 전선을 고착시키는데는 성공 했지만,
    방어군의 병력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였고, 조선 지상군의 최고의 전투병력인 북변의 병사들의 제대로 집결 한게 아니였습니다....소부대 단위로, 개별로 문자 그대로 급속남하 하여 계속 집결하는 상황이였습니다.

    이름은 기억안지만, 당시 무관출신의 야전사령관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병력이 모일때까지 방어에 치중하기로 합니다.
    근데 선조가 또 한명의 문관출신의 야전사령관을 임명, 따로 명령을 내리면서 지휘권 이원화로 제대로 된 지휘가 이루어지지 안는 상황에서, 방어에도 부족한 병력으로 무리한 역공을 감행 결국은 임진강 방어선을 그날로 끝납니다.

    근왕군 역시 선조의 닥달로, 제대로 된 정찰 활동도 없이 도성으로 무리한 강행군을 실시 용인에서 박살이 나죠.
    이로써 조선 가진 최고의 무력인 북변의 군 과 남은 정규군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답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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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벨 원사 2 염전노예 20.10.25 23:52 답글 신고
    선조가 디졌어야
    더 결사항전으로 임했을텐데, 도망 다니니까
    임금도 도망치는데, 나도 도망치자
    개판남
  • 레벨 대위 3 폭주완땅 20.10.26 02:21 답글 신고
    선조가 이순신만 끝까지 믿었다면 ? 역사에 if 어딧음?
  • 레벨 원사 3 GumMaru 20.10.26 02:35 답글 신고
    역사에 만약은 없어요 ............. 있다면 소설정도............
  • 레벨 중장 민증 20.10.26 08:15 답글 신고
    무엇보다도 정치인들의 무개념한 당파싸움질과 적을 얕잡아본 댓가지요..
  • 레벨 중위 2 쾨니히스티거 20.10.26 08:19 답글 신고
    조선 이승만.
  • 레벨 중위 1 파파마마 20.10.26 09:03 답글 신고
    아니라고 봐요
    우리나라 민족성은 오히려 왜놈들이 우리 임금을 죽여? 저 새끼들 다 죽여버려~~
    이렇게 나왔을꺼라고 생각해요
  • 레벨 훈련병 뇌물처먹고점프쿵깩 20.10.26 13:20 답글 신고
    문재앙 죽으면 잘 죽었다 생각할걸?
  • 레벨 중사 1 gulma 20.10.26 16:20 신고
    @뇌물처먹고점프쿵깩
    하수구가 말을하네?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09:24 답글 신고
    조선의 도성을 점령한 왜군들이 두가지에 굉장히 당혹 해 합니다.

    선조가 몽진을 하자 왜군들이 첫번째로 굉장히 당혹했다고 하죠.
    그네들의 전쟁방식은 군주는 최후까지 성에 남아서 항전을 하다, 항복 또는 지들이 이야기 하는 영애로운 죽음을
    택하는데, 한마디로 비겁하게 도성을 버리고 몽진을 할 줄 몰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통 전쟁은 군주 와 군주끼리 싸움이고, 단지 그 싸움에서 누가 이기냐에 따라 주인 바뀌다는점에서 일본
    민초들은 쇼군싸움에는 거의 관여를 안합니다...단지 바뀐 쇼군이 세금이 더 뜯냐 아니냐에 관심을 두죠.

    근데 조선을 일반백성들이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무기들고 들고 일어나고, 격렬하게 저항을 하죠.
    왜군들이 두번째로 당혹 했던점이 바로 전국각지의 의병 입니다.

    왕정국가에서 전쟁에 의해 수도를 버리고, 몽진 하는건 종종 있는 일 입니다.
    굳이 욕 할 필요는 없는 일이고, 수도에 남아 항전하다가 패했을때, 단순히 왕이 잡히는걸로 끝나는게 아니죠.
    국가를 운영,지휘,경영하기 위한 행정부,지휘부 가 모두 적한테 넘어갔다는 소리 입니다.
    한마디로 조직이 무너지고, 상대에게 접수 되었다는 겁니다.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09:40 답글 신고
    임진왜란 중 선조의 희대의 뻘짓은 바로 임진강 전투 입니다.
    여기서 조선이 가진 최고의 지상 전투병력인 북변의 군대를 이용 모루로 이용하고, 삼도에 결집도 5만의 근왕군을 망치 삼아
    제대로 지휘만 했었어도, 임진강에서 왜군을 막아 낼수 있었습니다.

    몽진이라는 국가의 최대의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는 야전사령관이 최대 무력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역모를 두려워 하게 되고, 문관 출신을 다시 야전사령관으로 내려 보내는 지휘권의 이원화.

    그리고 10만이 넘는 일본의 정규군이 상륙하여 본격적인 침공을 하여 도성을 힘없이 내준 상황에서도, 최대 2만 병력의정규군이 아닌 왜구로 판단하는 정보력 부재 과 그 와중에도 자신의 당파의 이익을 챙기려는 조정 중신들.
    한마디로 국가위기관리시스템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런 왜구무리에 힘없이 도성을 내줫다는 수치감에 의해, 임진강 방어군 과 구원하러 오는 근왕군을 계속 닥달하여,가뜩이나 지휘권 이원화로 망쪼가 들고 있는 임진강 방어군 과 근왕군이 힘없이 한타에 날려 버리게 됩니다.

    왜군의 쾌속진군으로 천혜의 방어선인 하천인 임진강을 방어선을 삼아, 전선을 고착시키는데는 성공 했지만,
    방어군의 병력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였고, 조선 지상군의 최고의 전투병력인 북변의 병사들의 제대로 집결 한게 아니였습니다....소부대 단위로, 개별로 문자 그대로 급속남하 하여 계속 집결하는 상황이였습니다.

    이름은 기억안지만, 당시 무관출신의 야전사령관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병력이 모일때까지 방어에 치중하기로 합니다.
    근데 선조가 또 한명의 문관출신의 야전사령관을 임명, 따로 명령을 내리면서 지휘권 이원화로 제대로 된 지휘가 이루어지지 안는 상황에서, 방어에도 부족한 병력으로 무리한 역공을 감행 결국은 임진강 방어선을 그날로 끝납니다.

    근왕군 역시 선조의 닥달로, 제대로 된 정찰 활동도 없이 도성으로 무리한 강행군을 실시 용인에서 박살이 나죠.
    이로써 조선 가진 최고의 무력인 북변의 군 과 남은 정규군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 레벨 대위 3 청석1 20.10.26 12:36 답글 신고
    문관을 지휘관으로 삼은건 당시 제승방략의 원칙을 따른거여서 결과론이 아닐까요,,
    물론 제승방략 이라는 전략 자체가 반역을 막기위한 계책이라서 , , ,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4:05 신고
    @청석1 제승방략 체계 이전의 진관체계도 임진왜란 당시 그리 힘을 쓰지 못했을 껍니다.
    진관체계 자체가 왜구 같은 소규모 침입에 대비한 체계이고, 임진왜란 처럼 대규모 병력이 몰려오는 전면전
    에서는 각개 격파 당하기 딱 좋은 전술 인거죠.

    이점은 조선을 인지 하고, 개선한게 제승방략체계 인거죠.
    병력을 모아, 중앙에 파견 지휘관으로 대규모 병력을 모아 일전을 벌인다는 자체는 나쁜 전술은 아니였습니다.

    문제는 그걸 시행하기 위한 조선의 군사력이 오랜기간의 태평성대로 취약했고, 또한 전초기지를 역활을
    하면서 적의 진격을 과 충격을 완화 시켜줄 각요충지들의 방어선이 너무 쉽게 무너졌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시간을 모아 병력을 모으고, 편성하고 재정비 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는 겁니다.

    문관을 지휘관을 삼는다....그러면 신립장군 과 이일 장군, 김명원장군 같은 야전사령관은 뭐죠?
    결론적으로 제승방략체계에 총지휘관을 문관 앉힌다는 제도는 못 들어 본적 같습니다.
  • 레벨 대위 3 청석1 20.10.26 15:11 답글 신고
    신립이야 사돈관계니 충성심을 의심 하지 않았을테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은 절대
    반역하지 않을 관리로 하는거죠

    어떤 체계든지 군역장부와 실지 동원된 병력과 차이가 심했다 합니다
    이억기와 이순신 정도만 제대로 관리가 되었다고 무리가 아니었죠

    원균이 판옥선을 자침시킨것도 그런맥락이었죠
    이순신보다 늦게 부임했다 알고있습니다
    그렇다고 원균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 레벨 중장 블키 20.10.26 09:47 답글 신고
    왕이 천도를 안했다면 꽤 길게 막았을거 같습니다. 좀 더 생각하면 점령은 못했을겁니다.

    탄금대 전투도 없었을수도 있어요. 광화문광장에는 이순신장군이 아닌 신립 장군의 동상이 서 있었을수도 있구요.

    일본군은 한양 양민들과 군사들의 엄창난 저항이 있었을겁니다.

    선조 한양 탈출후 양민에 의해 궁이 불탄것을 봐서도 한양 양민들은 왕과 결사 항전을 했을거라고 봅니다.

    진주성 전투에서도 그렇고 결사항전한 예는 많습니다. 한양에서 결사항전 해버리면. 답없죠.

    그당시 일본군이 한양까지 진군했던 일본군 선봉은 단 수만에 불과했으니 20만 한양 양민과 수만의 조선군이 버티고 있는 한양을 점령하기엔 엄청난 피해가 있었을겁니다. 공성전은 무조건 수비가 유리하니 말이죠.

    그 사이에 전국에서 봉기하여 오는 민군과 관군의 수도 엄청났을겁니다. 이후 광해군에게 지휘권을 넘겼을때

    광해군이 모은 군사와 군수가 엄청났다고 실록에도 있으니 수도가 버티고 있으면 무조건 달려와서 힘을 보텟을 겁니다.

    그뒤에 평양성등 여진족과 국경을 맞덴 군사의 규모도 있다고 하니 뭐..

    아~ 그럼 광해군은 다음 왕이 되지 못했었을수도 있내요.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0:12 답글 신고
    선조의 몽진은 탄금대 전투 패배로 인해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몽진을 안했으면 탄금대 전투가 없었을수 있다는 말은 잘못 된거죠.
  • 레벨 중장 블키 20.10.26 10:23 신고
    @6SAR 역사를 보면 선조가 자처해 몽진을 주장했다합니다. 부산이 뚫리고 엄청난 기세로 진격해온 왜군을 보고 말이죠

    몽진은 그전부터 말하고 있었으나 유성룡등 신하들의 반대로 못하고 있었고

    이후 신립군이 대패하여 전사하면서 유성룡등의 몇몇의 한양 방어에 명분이 적어지면서

    몽진에 힘이 실려 전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선조가 결사 항전의 의지가 있었다면 신립을 보내지 않았을겁니다. 선조의 신립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으니 말이죠. 전 막지 못하면 몽진한다라는 뜻으로 신립군을 출정시킨걸로

    전 그렇게 해석하고 싶내요. 잘못되었다 아니다라고 판단하는건 섣부르다 보내요.

    안타까운건 급하게 출정시키니 창병과 조총으로 이루어진 왜군에게 기병을 출정시켜버린것과

    신립이 후퇴를 하지 않고 전사를 택했냐는거죠. 기병이면 신속한 퇴각도 가능했을텐데 말이죠.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1:03 답글 신고
    "선조가 결사 항전의 의지가 있었다면 신립을 보내지 않았을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죠?

    신립장군은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던 최고의 패였습니다.
    충주가 뚫리면 한양까지는 단숨 입니다.
    그예로 충주가 뚫리면서 4일만에 한양에 입성 하였습니다.

    한양방어에서 충주는 주방어선 이나 다름 없는 곳 입니다...근데 신립장군을 안내보내요?
  • 레벨 중장 블키 20.10.26 15:44 신고
    @6SAR 공성전에 주 방어선이 무슨 의미입니까? 조선 자체가 원래 외세를 막을때 무조건 방어선을 성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공성전으로 막는 전략을 썼는데요?

    삼국시대 이후에 모든 한반도 국가는 공성으로 방어하는 전술을 폈으며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전쟁도 성을 위주로 전쟁을 했습니다. 그 성이 방어선입니다. 지역방어의 개념이 없는 시대인데?

    우리 역사중 거의 대부분의 승리는 공성 방어전이에요. 이건 기본중에 기본일텐데. 그렇게 따지면 님이 말하는 히든카드인 신립을 선조가 가벼히 출정시켰을까요?

    아래도 두분이 잘 설명했 있지만 급하게 졸속으로 출정시키지 않았다면 공성전을 위주로 편성하여 적을 막을 방법으로 출정시켰겠죠, 급하게 기병위주로 출정하고 충주에서 급하게 보병을 편입했을까요. 거기에 평지전투까지.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1:31 답글 신고
    조선이 일본에 정복 안당하거는 지금 평안도 지역 군민들 항전 덕택입니다
    선조가 의주로 대피 하며 조선측이 포기한 평양성을 점령한 코시니 유키나카군이 평양을 벗어나 북진하려하다가 평안도 지역에서 지역군민 들이 나서서 항전에 나서자 그이상 북진을 포기하고 평양성에만 틀어박힘니다
    그로인해 조선측이 재정비할 시간를 번데다가 명나라에서 원군이 도착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게 되지요

    만약 여기서도 일본군 북진 저지에 실패 햇다면 의주성 까지 밀고 올라와었을 거이구 조선조정은 와해되면서 사실상 항전을 포기하며 항복 해야 하는 단계에 까지 갔었을것이죠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1:37 답글 신고
    지금 조령 계곡을 이용하여 일본군 북상 저지를 명령한거는 선조및 조정의 작전적 실수이고 신립은 잘못한 전술적 대응로 탄금대에서 장열히 전사하며 그자신의 명예는 지켯으나 조선측이 당시 에 금쪽같은 군사 자산을 글어모아 급조한 중앙군단을 말아먹게한 실책을 범한건 사실이라
    즉 쌍방과실이란거이가 본질 이죠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1:47 신고
    @이슈타르 "지금 조령 계곡을 이용하여 일본군 북상 저지를 명령한거는 선조및 조정의 작전적 실수"
    이게 왜 작전상 실수 라는거죠?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2:00 신고
    @6SAR 왜 그런거시냐 하면 애초에 조선군은 훈련상태가 불량한 오합지졸이라서 훈련부터 시킨후에 전투에 투입햇어야 햇지요 그렇게 안하구서 막바로 투입한 결과 여기저기서 연전연패 당하고 해서 개전초부터 평안도 까지 조선측이 밀리고한 원인인검니다 이게 제1의 전략적 실수엿고
    다음으로 조령 주변에 우회통로가 많아서 (세어보면 6개나 됨) 코시니군이든 후속하던 다른 일본군이든 조령을 지키려하는 조선군을 앞뒤로 포위 공격이 가능하니 거기는 병법에서 말하는 死地가 되버리는 거지요
    최선은 이일장군이 제안한대로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어 항전하는 전략인거라서 신립은 후진해서 휘하 부대 이끌고서 한강까지 철수 했어야 한거지요
    그러나 용병을 모르는데다 조정은 피아간 전력차를 인지못하고 무리한 작전을 신립에다 강요 한것입니다
    신립의 잘못도 큰데 평지 전투에서 승부를 내고 할것이면 훨더 북방 야지에 전투를 걸엇어야지요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3:45 신고
    @이슈타르 왜 지금도 조령을 이야기 하고,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왜 조령을 보고 한탄 했겠습니까?
    고니시의 1군은 충주에서 신립장군을 격파하고, 기토의 2군 과 합류 한양으로 1,2군은 동서,서로 나누어 진군
    각 5월2일 과 5월3일 한양에 입성 합니다.
    3군인 구로다는 추풍령을 거쳐 7일에 입성 합니다.

    왜군의 주요 침공로 중 주력인 1군,2군 모두 충주 거쳐서 한양으로 진격 하는데, 무슨 우회로를 찾습니까?
    그리고 조령을 막아섰으면, 당연히 주변 우회기동 할만한 기동로 차단은 기본 아닙니까?
    조령이 천혜의 방어선이라고 이야기 하는게 소수병력으로 대규모 병력을 막아설수 있다는 건데,
    신립 장군이 실수 한건 천혜의 요새인 조령에서 막아선게 아니라 탄금대에서 막어선게 잘못 인겁니다.

    조정의 전략적 실수가 아니라, 신립장군의 전술적 판단 착오로 저 사단이 난거지요.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4:05 신고
    @6SAR 조령을 천혜의 요충지라고 본거부터가 잘못 본거 라는 거지요,,카토군만 해도 코니시군에 바로 후속해서 들어왔는데 설사 신립휘하 중앙군단이 조령에 포진한다한들 그냥 다른 통로를 통해 건너가면 그만여요
    타 군들이 추풍령을 통해 북진해 들어왓고..이들이 조령이 자리한 충주방면으로 나아갈시에 충주 근처에서 이들이 집결이 되는데 중앙군단이 좁은 고개길에 포진하는한 탈출로 조차도 사라져요..아니면 제2의 부대가 별로로 신립군단을 구원해 들어가든가 해야 하는데 그 시점에서는 제2 후속 부대 조차 편성 전이엿고 단독으로 저지에 나서는한 신립 군단은 그위치는 전투에서 포위 고립 당하는 조건이 당연한지라 패전이 결정적인검니다
    조정의 작전 지시가 조령에 포진해서 막아라고 한거인데 ,,근데 그게 막아져요??
    6개 통로중 4개를 막아놓는다 해도 나머지 2개의 통로가 남는데 어트게 거기를 막느냐 하는거지요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4:20 신고
    @이슈타르 "조령을 천혜의 요충지라고 본거부터가 잘못 본거 라는 거지요" 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거겠죠.
    요충지가 아님에도 불구 하고, 임진왜란 후 왜 조령에 3단계의 관문 과 요새시설 구축 했을까요?

    왜 조령을 두고 고니시 와 유성룡 그리고 이여송이 신립을 비웃고, 한탄을 했을까요?

    우회??.....님 주장에서 그게 제일 웃겨요.
    우회길 있는데 왜 왜군들이 굳이 험한 조령을 넘어오죠?

    조령초입에서 고니시는 지속적으로 수색,정찰을 보내고, 적정이 없다는 보고에도 불구 하고, 재차 수색,정찰
    을 보낸 후 적정이 없다는걸 파악하면서도 조령진입을 한참 고민하고 진군 합니다.

    님 말대라면 편한 우회길 두고 저런 고민 하면서 조령을 진입을 했을까요?
    그리고 가토는 왜 조령을 통과 해서 1군과 합류 했을까요?

    당시 교통로 상황상 조령을 통과 하지 않으면 대규모 병력 과 물자가 갈수 없었습니다.

    우회요? 한양에 입성한 고니시군을 한강이 아니라 우회해서 북한강을 도강해서 현재의 동대문쪽은 입성
    합니다....한강 방어선도 찾아보면 한양으로 가기 위한 우회로는 많아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한강 방어선 과 도성도 포기 해야죠.

    그리고 충주가 아닌 김천방면에서 청주,천안으로 오는 구로다의 3군 역시 요충지인 추풍령 방어선을 깨고
    올라 온겁니다.....그냥 무혈 입성 한줄 아세요?

    조선은 당시 충주,상주,추풍령 등등 한양으로 올라오는 주요목 방어를 위해 굉장히 신경 썼어요.
    결론적으로 단시간내에 방어선이 깨지고, 제대로 도성을 방어 할 시간도, 체계적으로 철수 할 시간 조차
    못벌어 부랴부랴 도망치듯 파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령방어선은 한양 방어라는 주목적도 있어지만, 왜군의 신속한 쾌속진군으로 제대로 병력을 모으고
    편성하고, 재정비 할 시간 특히 조선이 가진 최고의 지상군인 북변의 군사들의 남하 및 집결, 그리고 남도의 근왕군 조직 및 편성들을 위한 시간 벌기 였습니다.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4:34 신고
    @6SAR 뭐가 이상 하단 검니까??
    조령이나 다른 통로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신립 군단이 포진한 결과 전투가 여기서 벌어지고 한거이구..조령를 포기한 이상 일본군들이 굳이 다른길로 기동할 이유가 없고 바로 비워진거를 확인후 조령을 거쳐서 넘어간거지요 ..별 험허지도않은 소백산맥의 각 고개 정도는 잘 훈련이된 보병 위주의 일본군에다 장해가 될수가 없고 애초 일본 본토란게 우리지형 보다 험하면 험하지 더 완만 하지가 않치요
    아니 강을 건너가는게 쉽단거요?? 배를 못 마련시에 강의 도하는 못하는데 그런거 없이 가능한 고개를 건너가기는 비교가 안되게 용이 한거라 말이요\
    구로다 3군이 돌파한 추풍령 근처에서 조선군이 대거 투입되지도 않앗으며 전투도 일어나지도 않앗지요,,
    끌끌 뭔 충청도와 경상도 접경에다 신경을 써요??? 조정이 신립에다가 경기-도성내 가용병력을 모조리 몰아 투입하여 막으라고 해서 내보내고 한건데??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4:52 신고
    @이슈타르 조령말고 우회길이 많아서 조령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면서요.
    그 우회길이 조령 초입에서 갈라 집니까?....애시 당초 조령을 넘을수 밖에 없으니까 조령까지 왔게죠.
    무슨 조령을 포기해서, 조령을 넘었다는 신박한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별 험허지도않은 소백산맥의 각 고개 정도"....참내 어이가 없네.
    그것도 500년전 산길을 몇천 단위 병력이 쉽게 넘을수 있다고요? 님이 넘어보셨어요?
    그렇게 쉽게 넘을수 있는 산길을 두고 굳이 조령을 넘겠다고 온 고니시가 멍청한건가요?

    님 주장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데, 님의 요점은 이거잖아요.
    1.우회기동로가 많은 조령을 방어하는게 잘못 됬다...포위 될수 있으므로,
    2.이일 장군의 주장 대로 그 병력으로 천혜의 방어선인 한강을 중심으로 한양 방어선을 펼치는게 낫다.

    자....요충인 조령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우회로가 많아서 라고 하셨죠.
    한강 방어선은 우회로가 없는 단일 축선 입니까?...고니시는 한강을 넘은게 아니라 여주를 걸쳐서 북한강을
    도강 했습니다....님 주장 대로라면 한강 및 도성 방어도 전략적 실수네요.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5:09 신고
    @6SAR 일본군은 기동로를 여러개 설정해서 각대 마다 북진시켜서 올라간거고 이고..여러개 통로가 존재하는한 모든 통로를 전부 차단저지 하자니 병력의 분산을 초래 일본군은 그중 하나 정해서 돌파시 방어전에서 실패..이런 수순이라는 말 인거요
    누가 산허리를 타구서 북진한다 햇나요?? 고개가 비워진거 정찰 통해서 알래낸후라면 고개 버리고 누가 바보같이 산허리를 타구서 넘어갈 이유가 뭐요??
    신립이 끌고간 병력수준으로는 조령이든 그 주변부이든 못 막는다이구,,그러니 장소를 지정해서 작전 지시내린 조정이 잘못이 크다는점이 내 주장 요지이구 내가 하는 말이 무언지 잘 읽어보라는 검니다
    // 한강 도하 보다는 훨 쉬운것이 이미 길이 닦여져있는 고개를 넘기이다..더군다가 적 군사도 없는 고개길이다//
    조령은 한양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최단 핵심 통로엿으며 험하다 할수가 없다요..그데 거기 가보았냐니??..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 시대에 현장 방문 안하면 모른담니까??..지도를 포함해서 주구장창으로 나와요

    한강은 하천을 이용한 방어에다 도성내 인원들 포함해서 여기가 인구 밀집지대라 가용 인원 면에서 유리 하니 여기 나두고 어데서 막을 거냐 하는 건데 내말이 어데가 틀렷냐 말이요
    한강 같은 천혜 지형을 이용 않한 것이 조정에서의 중대 실책이란거인데 아직도 모르겟소???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5:23 신고
    https://blog.naver.com/finelegend/221420612281

    당시에 한강을 도강하여 한양 입성에 성공하기 까지 조선군과 일본군 모습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5:55 신고
    @이슈타르 60년전이나 지금이나 남침 진공로는 거의 변함이 없다고 하죠.
    지금 그러한데 500년전 열악한 도로 사정상 천단위, 만단위 병력이 넘을수 있는길은 한정 되어 있습니다.
    무슨 산맥을 타고, 산등성이 타고 우회를 해요?.....왜군이 무슨 산짐승 집단이에요.

    요충지라는게 그래서 요충지 라는거요....필수불가결로 꼭 지나가야 하는 기동로.
    님은 천단위 병력이 보급품 과 함께 가야 할 기동로 무슨 산짐승들이 다니는 길 또는 길을 만들어 가며서
    하는 길을 우회로 타령하면서 포위격파 이야기 하시는거고.....

    조령이 왜 천혜의 요새를 가진 요충지 이겠어요.
    백명으로 만명을 막을수 있는곳이라 평가하면서 지나가야할 요충이지, 천혜의 요새가 조령 입니다.

    우회로 라고는 하늘재,이화령 정도인데 여기는 조선시대에도 잘 사용하지 않는 샛길 입니다.
    문자 그대로 만단위 병력이 일렬가도 힘든곳이고, 험하기로는 조령 못지 않는 곳 입니다.
    여기에 치중대 까지 생각하면 갈수도 없는곳이고,여기야 말로 소수병력으로 틀어 막고 있는면 되는 곳 입니다.

    조령은 그런 대규모 병력이 온갖 보급품,장비등을 끌고 넘을수 있는 유일한 기동로 라는 소리 입니다.
    그런생각은 일도 안하고 얼척 없는 소리를 하고 계시니 문제 인거죠.

    장소를 지정해서 작전 지시내린 조정이 잘못이다.....이것도 웃기는 말 이네요.
    그럼 작전 지시 내릴때 어디어디 기동로 차단 하고 방어선 구축하라고 하지, 니가 가서 봐가면서 방어선 구축
    하라고 합니까?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 시대에 현장 방문 안하면 모른담니까?"
    이것도 얼척이 없네....지금 지형하고 도로망이 500년전 하고 같아요?

    "한강은 하천을 이용한 방어에다 도성내 인원들 포함해서 여기가 인구 밀집지대라 가용 인원 면에서 유리 하니 여기 나두고 어데서 막을 거냐 하는 건데 내말이 어데가 틀렷냐 말이요"

    저말은 자기가 말하고 자기 주장에 위배 되는지 전혀 모르시네...보통 자가당착 이라고 하죠.
    조령은 우회로 있어서 포위 당한다면서요?....한강은 우회 안당해요?..이미 고니시가 우회했는데...
    우회 당해서 전략적 가치가 없다면서, 우회 당하는 한강은 가치가 있어요?

    님 주장 대로라면 한반도에 방어 할만한 곳이 없어요....다 우회 가능한데요.
    하다 못해 길도 없는 산등성 타거나 길 만들어서 우회 가능하시다고 주장 하시는데 말 입니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6:36 신고
    한강 전체가 횡으로 나있는데..그래 일본군이 대략 가평 정도까지 우회한다 칩니다..가평 근처에서 도하후 다시 한양으로 재차 이동 해야 하니 이동거리가 길어지는데 조선군에 유리 하면 하지 불리하겟소??

    하천 도하 하느라 시간이 소요되므로 하천변에 조선군이 부분부분 대기 시키다가 도하지점을 탐지후 중간에 습격이 가능하고하니 조선군은 적은 희생 , 노력으로도 일본군에다 최대한 피해를 가할수 잇는 거란거구
    가평에서 서울 도성까지 중간지대가 역시나 고지대 산지이고..전투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은 매복 습격에 긴장하면서 수색을 거치면서 여기를 통과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리고 할거가 10에 9요
    충주로부터 서울까지가 대략 평야가 많은데 비해 여기는 높은 고산지가 주루룩이라 매복공격 가하기가 용이한 지리이구 조선군이 보다 적극적이면 매복의한 일본군에다가 슴격이 다반사로 벌어져야 정상인게요

    천년전이든 현재 시기이든 그자리 조령이야 산천 초목이 뭐가 달라진단 검니까??거기는 개발도 안하는 깡촌 오지인데 변한것 없는 옛날 그대로이고 현재 자연환경 보호 지역이요


    코니시군이나 카토군이나 각 번대가 대략에 1만 여명대이구 길은 여러가닥인데 소백산맥이 험해서 못 넘어 간다니?? 거 이상한 말 하지 맙시다

    조정이 어데어데에다 진지구축하고 지켜라 하는 식 명령을 전투임무부대에다 내릴 거가 아니구 현장에서 최고지휘관인 도원수 정도가 그거를 정하는 거라요..
    조선 정치구조에서 전문군인 출신이 조정에 자리잡고 전쟁 지휘를 시키는등을 맡기지를 않앗고 그러한식 지휘체제로는 지리적으로 수천리 위치한 이상 현장 상황을 잘 모르고해서 지휘관을 고생시키고 임무 실패의 이유가 된다오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20:27 신고
    @이슈타르 분명 제가 고니시의 예를 들었고,본인이 어떤 블로그 링크까지 걸어놓고 이해 안가세요?
    본인이 걸어놓으신 고니시 진격로를 보면 남한강,북한강 까지 도강 했네요.

    충주 전투 와 고니시가 한양 입성까지 얼마나 걸린줄 아세요?
    4월28일 충주 전투 승리.
    4월29일 가토의 2군 합류 대기.
    4월30일 가토의 2군와 함께 각지 동로 와 중로 진격하기로 하고 한양으로 진군 개시.
    5월2일 고니시 한양 입성.
    실제 한양을 목표로 진군해서 남한강,북한강 2개를 건너고도 한양에 도달하는데 3일 입니다.
    충주전투가 아니였으면,더 빨리 도착 했겠죠

    "하천 도하 하느라 시간이 소요되므로 하천변에 조선군이 부분부분 대기 시키다가 도하지점을 탐지 후"
    한성 부터 양평까지 거리는 보셨어요?.....이런건 왜 지도를 안보신데.....

    도강 할만한 곳곳에 감시 병력 깔아 놔야 되고, 즉각적으로 보고 할수 있는 신호체계 구축,
    그리고 그 지점까지 신속하게 도달 할수 있는 기마 위주의 기동군을 편성 해야 합니다.

    거기에 2군까지 하면 최소 2곳에 대한 도강이니, 여기에 대한 2개의 기동병력을 편성 해야 하네요.

    충주 방어선 주목적이 전시체계로 전환 하면서, 북변의 병사들의 신속한 남하와 집결 그리고 각도의
    병력들의 소집 및 재편성 인데, 과연 한강으로 방어선 삼았다고 그 시간을 벌었을까요?
    충주전투만 아니였으면 최소한 3일은 앞당겨서 한양 도착인데 말 입니다.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20:29 신고
    @블키 "조선 자체가 원래 외세를 막을때 무조건 방어선을 성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공성전으로 막는 전략을 썼는데요?

    근데 왜 신립은 조령을 포기 하는 대신에 충주성에 농성 할 생각을 왜 안했을까요?
    성을 무조건 방어선으로 잡는다면서요?

    부산진성,동래진성,김해읍성,영원산성,평양성등 대표젹인 공성전은, 공성전이 아니라서 그렇게 허무
    하게 무너졌습니까?...거기에 영원산성은 님이 이야기 하시는 대표적인 방어적 산성 입니다.

    조령은 성 이상의 천혜요새 이자, 전략적 요충지 입니다.
    신립장군의 조령포기에 대해 적장인 고니시 와 조선의 유성룡, 명나라의 이여송이 왜 그리 비웃고 한탄을
    했을까를 생각 해봐야죠.

    소수의 병력으로 틀어 막을수 있는 목은 성 이상의 가치를 가집니다.

    근데 여기를 포기 하고 다른성의 몇배나 커서 대규모 병력이 필요한 도성 수비에 치중을 해요?
    그것도 왕과 대신등 중추 지휘조직이 그대로 있는데 포위를 자청 합니까?
    한성이 송나라 시대 양양성 이나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도면 이해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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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벨 상병 날개airfoil 20.10.26 10:03 답글 신고
    그럼 이승만은?
  • 레벨 훈련병 기린이 20.10.26 10:26 답글 신고
    그 전에, 부산 앞바다에서 단 한번의 해전 없이 적의 상륙군을 저지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패착이라고 생각합니다.
  • 레벨 대령 1 6SAR 20.10.26 11:09 답글 신고
    이미 급습을 당한 상황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포구의 전선을 모으는데는 시간이 걸렸을 껍니다.

    최대의 패착은 급습으로 인해 조선수군의 가진 전력 의 반 이상과 조선수준은 최정예만 모아놓은 경상도 수군
    을 출전도 안하고 자침 및 해산 시킨 일이죠.
    최소한 전략적 후퇴를 위해 가지고 있는 전선 과 병력,물자를 보존만 했었어도 역사는 다시 쓰여졌겠죠.

    그래서 원균이 개새끼 라는 겁니다.
  • 레벨 대위 3 청석1 20.10.26 11:15 답글 신고
    선조가 몽진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일부 백성들이 항복하여 왜군에 가담하거나 길잡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왜군이 도성까지 파죽지세로 올라온건 길잡이 덕도 적지 않았다는 증거죠

    실지 몽진 이후 함경도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이 갑질을 일삼다 성난백성들에게 포박되어 왜군에게 넘겨졌죠

    몽진이 잘했다
    잘못했다를 떠나서 당시 조선은 백성들의 원성이 적지 않았다는걸 알수있는 대목이죠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1:17 답글 신고
    한양도성은 방어력이 약해서 여기서 농성 해서는 막강한 일본군을 저지해내지 못햇을거지요,,그러면 안전한 장소로 도주해야 하니 선조가 몽진 하기로한 결정은 현명하게 잘내린검니다
    일본군이 센코쿠 시대라는 내전 기간을 통해 전투기술의 발전을 가져와 공성전 능력도 막강 햇다고하니 한양성 정도로는 못 지켜내요
    참고로 조선시대 대학자인 이익이 그가 지은 성호사설에 한양성 ,평양성은 평지에 지어진 성벽이라 외침을 막아내지 못한다 라고 적을 정도 엿습니다

    애초에 조선건국시 지금 서울 종로구 자리에 도읍용 도성을 지은거 부터가 잘못한 처사 였지요
    도읍 주변에 대피용 요새을 가지든가 안그러면 북으로 가로질러 강이 흐르는 강의 하남에다 도읍이 지어졋어야 하는데(즉 한강 이남 자리로) 이런 방어적인거 무시하고 지어진거가 조선의 도읍 엿죠(풍수로만 따져서 선정한거임)..그러한 점은 평양성 . 개경,,다 마찬가짐니다 ..
    선조는 평양성이 들어간후 여기도 포기 하고 다시 의주로 몽진하는데 ..이역시 같은 이유에섬니다

    북으로 강을 머리로두고 도읍이 정해져야 하는 이유는 고려나 조선이나 주로 북방으로부터 외침을 당해서지요

    그러하므로 고려 창업시 도읍인 개경이나 고구려의 3번째 수도로 정해진 평양이나 도읍 자리로는 전쟁시 도움을 못주는 그런한 도성구조 엿던게 과거 2왕조가 외침에 자주 흔들리고 한 이유이지요

    원래 한반도는 국토 곳곳에 강력한 방어력의 산성들이 줄비한 지형으로서 외침을 당하면 산성에 의거하여 침략자와 싸우고 한것이 전통적 전략 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국가 중심인 도성에다는 그러한 방어적 요구를 적용 안시키구서 편의성 위주로 선정한 잘못을 범한거지요
  • 레벨 대위 3 청석1 20.10.26 12:14 답글 신고
    한양성은 행정수도였죠
    북쪽의 적이 침략시 남한산성
    남쪽의 적이 침략시 북한산성으로 정부를 옮겨 농성하며 근왕군을 기다리는 전략
    따라서 한양성은 위엄을 과시 하는 용도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 레벨 훈련병 이슈타르 20.10.26 12:24 신고
    @청석1 임진년 당시에는 남한 산성은 축조전 였습니다,,인조대에 가서야 산성이 구축이 되지요
    임진년 이전 시기 같으면 조정의 전쟁시 대피는 강화도 였는데..강화도로 몽진이 문제는 우세한 일본 수군이 공략 해들어올거를 감안해야 할테라 거기로 안갓을 거지요
    북한산성이 축조는 언제냐 하면 숙종시기 엿으며 북한산성 하단에 중흥 산성이라고해서 작은 산성 하나는 고려조 부터 존재해왓어요 그러나 작은 부지로서 전시 대피용이 못 되었습니다
    선조 시기라면 자모산성이라고 고려조 이래 역대 북방으로부터의 남침에다 방어적 핵심 였으나 선조는 이리로 몽진 안하고 의주로 갔습니다
    도읍지을 위엄을 부리기로 해서 선정 자체가 국가 방위에 대한 나태함, 경솔함에 다름 아니죠 ,,고려나 조선이나 강한 나라가 아닌 국력에서 약한 나라란건 감안 햇어야 햇죠
  • 레벨 대위 3 청석1 20.10.26 12:39 답글 신고
    동감합니다
    전쟁 대비 자체가 제승방략 으로 반역을 두려워한 정권이었죠
  • 레벨 대령 3 미투고고 20.10.26 12:05 답글 신고
    왕이 자리을 옮긴다가 아니라 도망같다고 역사에도 나오는 사실이니 얼마나 쪽팔릴까
  • 레벨 소장 우리가족행복보장 20.10.26 13:48 답글 신고
    쪽발이들이 간과한 세가지

    이순신

    민중의 항쟁

    선조의 도주속도


    쪽발이들이 선조를 포기하고 전라도쪽으로

    틀어서 곡창지대 점유 후 장기적인 육상전투를 대비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는 토요토미가 서있음
  • 레벨 원사 3 현암고양이 20.10.26 17:55 답글 신고
    여러 고견들 잘들었고 감사합니다.
    특히 몇몇분들 학식이 상당하신것에 대하여 놀랐습니다. 저도 감히 끼여들자면 봉건시대 국가관은 지금의 국가관과 판이하게 다르다는겁니다. 짐은 곧 국가라는 것이 봉건시대의 국가관으로 이는 임금만 죽이거나 사로잡으면 나라전체가
    저절로 무너질수있는 시대였죠. 충성의 충의 의미는 지금처럼 국가와 국민에 대한것이 아니고 오로지 임금 에게만 국한된것이였습니다.

    한양도성에서 선조가 결사항전하였을것을 가정한다면 무척 회의적입니다.
    궁궐별감,착호갑사,내금위,사령들,금군들, 도성의 양민들
    총동원되도 그 길고 넓은 한양도성을 애워쌓서 방어할 병력도 되지않았을겁니다.
    파발을 띄어 북변군사들이 도착하기전에 한양의 임금은 왜군의 포로가 되었을게 뻔한것 아닐까요
    그리되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일본어 쓰고있겠죠
  • 레벨 소령 1 누가기침소리를내었는가 20.10.26 18:13 답글 신고
    그렇게 가정하기 전에 애시당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파견한 조선통신사 중 황윤길의 말을 믿지 않고 김성일의 말을 받아들여 왜란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군주로서 선조의 책임이 훨씬 큽니다. 처음부터 황윤길의 말을 믿었다면, 심지어 그 당시 조선 통신사 일행 대부분의 주장이 황윤길과 같았으며 히데요시가 침공해오지 않을거라는 주장은 김성일의 단독주장이나 마찮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김성일의 손을 들어주어 왜란 대비에 소홀히한 죄만해도 선조는 역사의 죄인입니다.

    선조의 한양천도 덕분에 우리가 지금 나라를 보전했다?? 물론 선조의 한양천도는 결과적으로 전략적으로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그 이전과 이후에 임진왜란을 진즉에 예방하고 방어할만한 수많은 결정적인 순간에서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서 그당시 조선인구의 절반 가까이 죽게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열번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한번 좋은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 덕에 우리가 살아남았다 하는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레벨 소령 1 누가기침소리를내었는가 20.10.26 18:37 답글 신고
    대부분의 역사학자 혹은 전쟁사 전문가들이 선조의 몽진이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이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선택이라는데에는 동의합니다. 그것은 사실 왈가왈부 따질 일도 아닙니다. 당시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이미 조선에 상륙한 10만 이상의 왜군을 상대로 한양을 지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몽진 자체가 전략적으로 어떠한 선택이었냐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럼 선조의 몽진 결정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냐? 우리 민족이 그나마 이렇게 살아남은것이 선조의 덕이냐? 라고 한다면 문제는 전혀달라집니다.

    애시당초 선조의 저 몽진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일신만을 보존하기 위한 도망이었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선조가 평양에서 의주까지 도망갔다가 종국에는 명나라로 망명할 뜻을 내비추었고 신하들이 강하게 만류한 덕분에 이를 겨우 말릴 수 있었다는겁니다.

    그러니까 선조 이새끼는 그냥 군주로서 쓰레기에요 ㅋ 아무리 중세 봉건시대(조선이 중세봉건시대인지는 저는 조금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만) 국가관이 왕이나 임금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중세 이전에 고대시대에도 훌륭한 왕들은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있었고 이를 후대에 가르쳐왔습니다.

    어떤 중세 왕국도 왕이 나라의 가장 중심이니 백성과 국토를 다 버리더라도 왕만 잘 살면 된다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았구요. 더욱이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군주란 백성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어버이이자 제일 큰 어른인 임금이 국가을 위해서 전략적 차원에서 퇴각을 한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말그대로 빤스런을 한것입니다 ㅋ 이게 어떻게 비판받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결과적으로 이러한 몽진 덕에 전선이 길어지고 우리가 반격할 시간을 벌었다는 점에서 몽진이라는 선조의 선택이 나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것 하나 가지고 선조가 조선을 구했다, 혹은 선조가 공을 세웠다 이런식으로 선조를 재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선조는 몽진 이전에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었던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나쁜 선택을 하였고 임진왜란중에서도 수차례 잘못된 선택으로 조선의 피해를 키웠습니다. 선조는 명실 상부한 암군 중에 암군인것이죠
  • 레벨 원사 3 현암고양이 20.10.26 18:43 신고
    @누가기침소리를내었는가 구구절절 일리있습니다.
    제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네요 고맙습니다!
  • 레벨 중장 블키 20.10.28 11:40 신고
    @누가기침소리를내었는가 맞습니다. 선조의 몽진은 왜군이 처음 침략했을때부터 선조가 자초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거기에 동조하는 신하와 동조하지 않는 유성룡같은 신하의 대립이였죠.

    그리고 몽진을 안했다고 조선이 없어지냐?

    조선은 일본과 달리 다이묘 죽거나 항복을 하면 그 밑으로 들어가 모든 전권을 갖는 그런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삼봉 정도전이 만들때 왕권보단 조정은 왕을 견제하고 법전을 기초로 한 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선조가 일본에 잡힌다 쳐도 다른곳에서 왕이 없는 조정이나 세자를 또는 대왕 대비등을 중심으로한 조정이 구성되어

    운용했을거라 봅니다. 맘에 안들지만 명나라에서 그렇게 다른 왕을 책봉해버리면 끝나는거고.

    결코 선조가 잡히거나 죽었어도 조선은 유지다 되었다는거죠 전 그렇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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