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그룹의 포르쉐는 911부터 시작해서 고성능 스포츠카와 세단, SUV 를 생산하는
독일의 자동차 회사입니다.
그 포르쉐사를 설립한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는 히틀러와 깐부 수준으로 친했습니다.
물론 포르쉐 박사 역시 나찌당 지지자인건 당연한거구요.
친나찌라며 두고 두고 비판 받고 있는 이유죠.
위 사진들은 1939년 4월 20일 히틀러의 50번째 생일에 찍은 사진이고.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히틀러에게 차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후륜 구동에 시속 100 키로로 아우토반을 달리고
엄마, 아빠, 아이셋 5인 가족들을 태우면서
1,000 제국 마르크의 저렴하고 튼튼한 차라는 국민차 계획을 세운 후
포르쉐 박사에게 의뢰했었습니다.
그렇게해서 나온게 바로 폭스바겐의 KDF Wagen , 즉 비틀이었죠.
근데 엄밀히 따져보면 체코제 대형세단 타트라 T97 (Tatra T97) 의
레이아웃과 엔진설계를 그대로 베껴서 만든겁니다.
이게 바로 타트라 T97 입니다.
어떻습니까 ?
폭스바겐 비틀과 거의 형제 차 처럼 보일 정도로 비슷해보이지 않습니까 ?
당연히 체코의 타트라사에서 항의했고 히틀러가 해결하겠다고 중재했습니다만 ,
나중에 체코 합병 이후에 그냥 없던일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2차대전 이후에 서독 폭스바겐이 체코 타트라사에 배상금을 지불하는걸로
종료됩니다.
바겐이 독일말로 차라는건 알겠는데 KDF 는 뭐꼬 ? 라는 질문이 드실겁니다.
이 KDF 는 독일어로 Kraft durch Freude , 즐거움을 통한 힘이란 말인데
독일 제국 노동부 KdF 프로그램의 명칭입니다.
말 하자면 나찌 정권의 대국민 리조트 프로그램이고
프로라에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휴양지까지 세웠습니다.
당시 나찌 정권은 990 제국 마르크인 KDF 바겐을 내세워
KDF 바겐 자가용을 가지고 싶다면 일주일에 5마르크씩 저축하라고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순진한 국민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5제국마르크를 내고 KDF바겐 우표를 받아서
그걸 모은 카드를 모두 채우면 차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KDF 우표입니다.
그리고 이게 돈을 주고 받은 우표 모음 카드입니다.
그런데 단 한번이라도 내지 못하면 그동안 낸 돈은 몰수당했습니다.
더 골 때리는건
매주 KDF 우표를 사서 돈을 내고 모은 사람들은
그 누구하나 차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국민들이 낸 돈이 어디로 갔을까요 ?
하필이면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세계대전이 터졌고
모든 공장들이 군수품 생산을 해야하다보니
더 이상 KDF바겐은 생산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히틀러 나찌 정권에서 그냥 꿀꺽 했다고 봅니다.
전쟁 물자 구매에 돈을 썼다고들 하는데 ....
글쎄요. 그걸 누가 믿을까요 ? 슈킹~ 슈킹~ 꿀꺽! 꿀꺽!
저는 히틀러 나찌 정권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다고 봅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여기서 끝냈더라면 문제가 아니었을텐데
연이어서 군용 차량 납품에 뛰어듭니다.
대표적인 예가 폭스바겐 비틀 TYPE 1 을 기반으로 개발한
다목적 군용 차량인 퀴벨바겐이며...
그 파생형인 수륙양용 차량 슈빔바겐입니다.
두 차 모두 짚차처럼 연락 , 정찰용으로 요긴하게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포르쉐 티거 VK 45.01(P) 입니다.
포르쉐 티거가 골 때리는게 나름 내연기관 하이브리드 방식의 엔진이었습니다.
연료를 태우고 그 에너지로 발전기를 돌려 발전기가 생산한 전기로
전기모터를 돌려 차량이 굴러가는 방식, 즉 하이브리드 엔진을 탑재했습니다만
그 당시 기술로는 완벽하게 개발하기가 어려워
계속 고장만 나서 티거 전차 수주에서 탈락했습니다.
아니 조금만 달리면 엔진에서 불이 났습니다.
예를 들자면 진흙에 빠지거나 25도 경사만 만나도
기동 모터가 타버려서 가동 불능이었죠.
결국 미리 만들어놓은 차체가 아까워스리 용도변경을 한게
페르디난트라는 대전차 자주포였습니다.
쿠르스크 대전투에 나섰지만 근접 방어용 기관총이 없어
소련군 보병들이 전차 주위에 달려들어 던지는 화염병, 폭탄 투척에 꽤 애를 먹었습니다.
그 이후에 차체 전면에 기관총을 추가하고 몇가지 개수를 거친놈이 엘레판트죠.
포르쉐 박사가 만든게 저것들 말고도 티거 II , 초중전차 마우스 도 있지요.
물론 둘다 하이브리드 엔진이었고 같은 이유로 망했습니다.
사실 포르쉐 박사의 하이브리드 엔진 집착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기계식 트랜스미션의 충분한 신뢰성 확보가 어려워 50톤 이상의 중전차를 움직이려면
부득이하게 이것 이외의 방법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이 방식은 기계식 트랜스미션보다 속도 제어에 유리하며
효율 측면에서도 나름 유리한 점이 있었다는거죠.
이 방식은 엔진이 낼 수 있는 토크도 강력한 편이라
당대 기술력 상으로 몇 백톤대의 중량물을 움직이는데 있어서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는건데
문제는 그 당시 전기 모터 기술로는 구현이 힘들었다는겁니다.
전차가 주로 지나가는 야전에서 험지 돌파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게 구려서
모터 과열로 엔진이 저절로 불타는 등 그야말로 최악의 신뢰성을 자랑하는 결함품
선회 반경이 안드로메다 수준이었습니다.
포르쉐 박사가 고집한 하이브리드 방식은 저 당시에는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는 거죠.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에 포르셰 박사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고,
1948년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 이후 무죄 판결을 받은 후 1951년 사망합니다.
그가 무죄를 받았다고해도 2차대전 이전 부터 보여왔던
친히틀러 행보에 대해서는 저는 지금도 그렇게 좋게 보지 않습니다.
권력을 등에 업고 본인이 하고픈 일을 하고자했던
평범한 속물 그 이상 , 그 이하도 아니라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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