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뒤통수 친게 한국입니다.....92년 중국의 수교 조건이 대만과의 단교였습니다.국익을 위해 대만을 버린게 한국입니다. 대만은 우리 임시정부시절부터 도와주던 나라였고, 한국전쟁 당시 un파병동의안에 제일먼저 찬성한 국가입니다. 그래서 대만이 혐한을 가진게 된겁니다.사실은 바르게 알고 가야죠...
뭔 소리인지 ㅡ.ㅡ; 누가 보면 아직 일본은 수교 하고 있는 줄 알듯 일본이 먼저 뒷통수 침. 그나마 한국은 늦게 단교 한 편 임 그리고 대사관은 없지만 그래도 외교부 직속의 대표부도 있음 ㅡ.ㅡ; https://namu.wiki/w/%EB%8C%80%EB%A7%8C/%EC%99%B8%EA%B5%90
김영욱 씨의 근본 사상에 친중을 넘어서 어느 한 개인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포장이 숨겨져있음을 아셨으면 합니다.
많이 배우시고, 스스로 노력하셔서 그 분이 말하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높은 위치에 오른 분은 말과 행동의 교양과 지식보다
양심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ㅎㅎ 대만이 혐한을 시작했던게 언제부터였는지 알고 있나요? 우리가 단교를 통보한 시점부터입니다. 우리의 단교이유가 어찌되었든 대만 입장에선 우리가 의리를 버린 국가 맞습니다. 단교를 다른나라보다 늦게 했다고요? 늦은만큼 충격이 컸나보죠. 입장을 바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팔라우를 일본이 어떻게 생각하냐면
태평양 전쟁시 점령했던 국가로 아직 일본어의 잔재가 남아있고
국기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일본은 해
팔라우는 달을 국기로 쓰고있다고 방송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 팔라우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모르겠지만
일본은 여전히 자기네 속국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팔라우 국민들은 일본에대해 오히려 좋은 감정이 있다합니다. 한국인,중국인 데리고와서 섬 사이 다리 놔줘, 비행장 만들어줘, 도로 닦아줘..시부랄.
팔라우 유명한 다리중에 아직 잘 쓰고있는 아이고다리가 있습니다.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이 건설하면서 너무힘들어서 아이고 하면서 만들었다는
1. 고려왕조는 스스로 송나라에게 조공과 책봉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송나라는 북방 오랑캐들에게 오해를 받을까(고려는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셨던 관계) 난감해 했다.
2.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하면서부터 명나라의 속국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조선이라는 국호(國呼)도 명나라가 정해준것이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이라는 두개의 국호를 들고 명황제에게 국호를 정해달라고 읍소하였다. 명황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나라라고 하여 조선으로 국호를 정해주었다.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대조지은(大造之恩)이라고 칭하였다. 국호를 타국에서 만들어준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조선밖에 없었다.(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증거중에 한가지)
3. 조선은 공식적으로 '유명조선국(有明 朝鮮國)'을 통해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자처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4. 조선은 스스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5. 조선은 독자적 칭호가 아닌 '왕' 을 사용했다. 여기서 "왕" 은 황제국인 명나라의 속국중에 왕을 의미했다.
6. 조선궁궐은 명나라의 문양인 용문양을 새겨넣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였다.
7.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은 이것은 중국 왕조가 조선에게 주어진 말이다. 즉, "중국의 속국으로서 예절을 다한 나라" 이다.
8. 명나라는 조선을 순이(順夷) 라고 불렀다. 즉, 명나라에 순종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여러 속국(북적, 서융, 남만)들중 중원의 한족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없는 유일한 식민지가 바로 조선이였다.
9.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의 주인은 명나라 천자(天子=황제)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광해군은 이런 말을 하는 사대부들을 매우 언짢게 여겼다.
10. 조선의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은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대외적으로 선포한 건축물이다.
11.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 천자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자 선정도 명나라가 정해주었다.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12. 명/청나라는 조선의 왕비나 왕태자 폐립에 이르기까지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조선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지휘 감독하고 있던 것은 명/청나라 대신(大臣)들이었다.
13. 명/청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왕은 고관들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까지 영접을 나가 무릎을 꿇고 사신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연회를 개최하여 극진히 접대해야 했다. 조선 세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명/청나라 사신들에게 예를 올리고 읍소를 했다.
14. 임진왜란시 명군이 파병되자 전작권은 명나라에게 넘어간다. 명나라는 조선을 제외시키고 일본과 전후 조선에 대해 강화협상을 했다. 조선에겐 주권이 없었고 전작권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면 조선은 식민지라서 종주국 명나라가 강화 협상에 참여하는것을 뒤에서 보고만 있을수밖에 없었다.
15. 금나라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나라 속국임에 시비를 걸고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16.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청나라는 임금 / 조선은 신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인조는 명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하며 울부짓으며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오랑캐)의 식민지가 되는것에 대해 자괴했다고 한다.
17. 조선은 동남아, 서양, 인도 등 외국과 직접적인 물자 교역을 하지 못했고 오로지 명나라를 통해서만 대리 교역을 하였다. 왜냐면 명나라가 종주국인 명을 통해서만 교역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 조선은 해마다 종주국인 명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고대시대는 독립적인 국가들끼리는 절대로 조공거래는 하지 않았다. 고로 조선은 100% 중국의 조공국이자 속국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19. 조선시대 최고 문인 '송강 정철' 도 자신이 죽자 묘비에 "명나라를 섬기자" 라고 새겨놓았고 속리산 화양동 계속에 명황제 제사를 지내주는 '만동묘' 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달도 명나라 것이다" 라는 뜻이다.
20.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글이 천한것들이나 쓰는 저급한 언어라고 하였고 사대부들끼리는 명나라 언어로만 대화 하였다. 명나라 유학을 최고의 입신양명의 길로 여겼으며 명나라 시를 읇거나 명나라에서 수입해온 물건을 가장 아꼈다.
21. 명나라가 관우한테 제사를 지낼 사당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조선은 즉시 2년만에 동묘/남묘/북묘/서묘를 지어 명나라에 충성을 보였다 (지금도 동묘는 보물 142호)
22. 명나라 군이 8년간 조선에 주둔하면서 닥치는대로 성폭행과 약탈, 살인을 했으나 조선의 조정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명군이 오면 조선농민들은 귀중품을 땅에 묻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조선농민들은 왜군을 더 반겼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23. 숙종은 대보단(大報壇)이라는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지내주는 제단을 만들고 사대부들은 종주국인 명나라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를 한다. 망한지 200년이나 넘게 타국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던 나라는 세계사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였음이 행복했다는 증거다.
24.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에는 '청나라 와의 사대관계 폐지와 독립' 을 촉구했다.
25.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문에서 "독립" 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26.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선언은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27.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였다. 즉, 주변국들(일본, 러시아)도 조선이 청나라의 식민지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기록이다. 고종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매우 반겼으며 청나라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후 조선은 곧바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의리 지키다간 피봅니다. 조심해야됨
대만 언론들이 혐한방송에 집중하고
대만 정치인들이 혐한막말을 공개적으로 내뱉은게 얼마전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만놈들도 결국 짱깨란걸
쾌적해짐.
제주도민분들 제주가살려면 짜장들 내보내고 못오게해야함
의리 지키다간 피봅니다. 조심해야됨
대만 언론들이 혐한방송에 집중하고
대만 정치인들이 혐한막말을 공개적으로 내뱉은게 얼마전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만놈들도 결국 짱깨란걸
사실은 바로 알고 가자고 하시기에 적습니다
유튜브에서 " 도올 김용옥의 대만역사의 이해" 시청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겁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아시면 됩니다
https://namu.wiki/w/%EB%8C%80%EB%A7%8C/%EC%99%B8%EA%B5%90
지나친 사랑과 포장이 숨겨져있음을 아셨으면 합니다.
많이 배우시고, 스스로 노력하셔서 그 분이 말하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높은 위치에 오른 분은 말과 행동의 교양과 지식보다
양심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중국관광객 안오니 자연 환경이 더 좋아지고~~~
깨끗한 섬나라는 관광객이 더 늘어나겠지요^^
페스카마호 한국인 선원살해 시체바다에유기 타국밀항시도한 중국인, 운명처럼변호를 맡았다하시고 가족까지 초빙하신 , 그다음 분도있는데요 뭘..
대만도 일제식민지였는데 무슨 왕따에 도움:? 물론 대만은 식민지지만 군인이들어간게아니라 우리랑 다르게받아들이고 정말 도로짓고 일자리준다고 생각하고있는건 알겠으나 전범이있는 야스쿠니에 까지와서 충성을한다는걸 말한건데 한국식이니 뭐니 궤변을펼치네 무식하면 책좀읽고 검색좀해라
일본에 어떻게 대항을 해요? 평생 나보다 쎄 보이는 놈 앞에 비굴하게 고개 숙이고 그렇게 살아라.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있어도, 기독교도 한다는 소리는 똑같겠지...
대만과 단교했던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부럽네요
그러니까 취직이라도 해바.
여기 가보고 나서는 다른 곳의 호핑투어는 호핑투어도 아니었음...
중국놈들 이미지 하긴 지들이 만들었으니
태평양 전쟁시 점령했던 국가로 아직 일본어의 잔재가 남아있고
국기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일본은 해
팔라우는 달을 국기로 쓰고있다고 방송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 팔라우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모르겠지만
일본은 여전히 자기네 속국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팔라우 유명한 다리중에 아직 잘 쓰고있는 아이고다리가 있습니다.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이 건설하면서 너무힘들어서 아이고 하면서 만들었다는
강국한테 절대 꿇리지 않으시던
대만가보면 이게 대만인지 일본인지 모를 정도로 친일본색이 뚜렸함
나트랑 빈펄랜드에서 짱깨년놈들의 무질서와 엽기를 봐서 짱깨많은 관광지가시면 스트레스 받습니다
1. 고려왕조는 스스로 송나라에게 조공과 책봉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송나라는 북방 오랑캐들에게 오해를 받을까(고려는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셨던 관계) 난감해 했다.
2.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하면서부터 명나라의 속국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조선이라는 국호(國呼)도 명나라가 정해준것이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이라는 두개의 국호를 들고 명황제에게 국호를 정해달라고 읍소하였다. 명황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나라라고 하여 조선으로 국호를 정해주었다.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대조지은(大造之恩)이라고 칭하였다. 국호를 타국에서 만들어준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조선밖에 없었다.(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증거중에 한가지)
3. 조선은 공식적으로 '유명조선국(有明 朝鮮國)'을 통해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자처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4. 조선은 스스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5. 조선은 독자적 칭호가 아닌 '왕' 을 사용했다. 여기서 "왕" 은 황제국인 명나라의 속국중에 왕을 의미했다.
6. 조선궁궐은 명나라의 문양인 용문양을 새겨넣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였다.
7.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은 이것은 중국 왕조가 조선에게 주어진 말이다. 즉, "중국의 속국으로서 예절을 다한 나라" 이다.
8. 명나라는 조선을 순이(順夷) 라고 불렀다. 즉, 명나라에 순종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여러 속국(북적, 서융, 남만)들중 중원의 한족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없는 유일한 식민지가 바로 조선이였다.
9.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의 주인은 명나라 천자(天子=황제)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광해군은 이런 말을 하는 사대부들을 매우 언짢게 여겼다.
10. 조선의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은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대외적으로 선포한 건축물이다.
11.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 천자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자 선정도 명나라가 정해주었다.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13. 명/청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왕은 고관들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까지 영접을 나가 무릎을 꿇고 사신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연회를 개최하여 극진히 접대해야 했다. 조선 세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명/청나라 사신들에게 예를 올리고 읍소를 했다.
14. 임진왜란시 명군이 파병되자 전작권은 명나라에게 넘어간다. 명나라는 조선을 제외시키고 일본과 전후 조선에 대해 강화협상을 했다. 조선에겐 주권이 없었고 전작권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왜냐면 조선은 식민지라서 종주국 명나라가 강화 협상에 참여하는것을 뒤에서 보고만 있을수밖에 없었다.
15. 금나라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나라 속국임에 시비를 걸고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16.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청나라는 임금 / 조선은 신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인조는 명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하며 울부짓으며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오랑캐)의 식민지가 되는것에 대해 자괴했다고 한다.
17. 조선은 동남아, 서양, 인도 등 외국과 직접적인 물자 교역을 하지 못했고 오로지 명나라를 통해서만 대리 교역을 하였다. 왜냐면 명나라가 종주국인 명을 통해서만 교역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 조선은 해마다 종주국인 명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고대시대는 독립적인 국가들끼리는 절대로 조공거래는 하지 않았다. 고로 조선은 100% 중국의 조공국이자 속국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19. 조선시대 최고 문인 '송강 정철' 도 자신이 죽자 묘비에 "명나라를 섬기자" 라고 새겨놓았고 속리산 화양동 계속에 명황제 제사를 지내주는 '만동묘' 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달도 명나라 것이다" 라는 뜻이다.
21. 명나라가 관우한테 제사를 지낼 사당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조선은 즉시 2년만에 동묘/남묘/북묘/서묘를 지어 명나라에 충성을 보였다 (지금도 동묘는 보물 142호)
22. 명나라 군이 8년간 조선에 주둔하면서 닥치는대로 성폭행과 약탈, 살인을 했으나 조선의 조정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명군이 오면 조선농민들은 귀중품을 땅에 묻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조선농민들은 왜군을 더 반겼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23. 숙종은 대보단(大報壇)이라는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지내주는 제단을 만들고 사대부들은 종주국인 명나라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를 한다. 망한지 200년이나 넘게 타국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던 나라는 세계사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였음이 행복했다는 증거다.
24.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에는 '청나라 와의 사대관계 폐지와 독립' 을 촉구했다.
25.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문에서 "독립" 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26.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선언은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27.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였다. 즉, 주변국들(일본, 러시아)도 조선이 청나라의 식민지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기록이다. 고종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매우 반겼으며 청나라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후 조선은 곧바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만좀 올려라.
외우겠다..
후진타오에게 강력히 항의 해야합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이라우단교 하고 대만이랑 수교해야하는데~
대만이 싫어하는 이유가 장쩨스가 상햐임시정부에 그렇게 돈을 줬는데 결국 단교 후 중국과 수교함
그래서 대만인들이 한국을 싫어함
몸담궜는데 해파리 도망감
잘못했다고 한국광고계약 끊었던데 그런애들그냥
추방해라 공산당애국심강한데 중공가서 하라고해라
짱게들좀 한국에그만받어라 나라팔아먹을래?
대한민국 전체를 짜장타운만들래 버려라
중공 귀하시험폐지하고 비자발급해주지말고
귀하자들 전원추방해라 자고로
중공은 물건이고 사람이고 하나 쓸때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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