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왕조는 스스로 송나라에게 조공과 책봉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송나라는 북방 오랑캐들에게 오해를 받을까(고려는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셨던 관계) 난감해 했다.
2.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하면서부터 명나라의 속국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조선이라는 국호(國呼)도 명나라가 정해준것이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 이라는 두개의 국호를 들고 명황제에게 정해달라고 읍소하였다. 명황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나라라고 하여 조선으로 국호를 정해주었다.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대조지은(大造之恩)이라고 칭하였다(명나라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 국호를 타국에서 만들어준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조선이 유일하였다.(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증거중에 한가지^)
3. 조선은 공식적으로 '유명조선국(有明 朝鮮國)' 을 통해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자처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유명조선국 = 명나라의 조선국이라는 의미)
4. 조선은 스스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5. 조선은 독자적 칭호가 아닌 '왕' 을 사용했다. 여기서 "왕" 은 황제국인 명나라의 속국중에 왕을 의미했다.
6. 조선 궁궐은 명나라의 문양인 용문양을 새겨넣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였다.
7.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주어진 칭호이다. 즉, "명나라의 식민지국으로서 예절을 다한 나라" 라는 뜻이다.
8. 명나라는 조선을 순이(順夷) 라고 불렀다. 명나라에 순종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여러 속국(북적, 서융, 남만)들중 중원의 한족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없는 유일한 식민지가 바로 조선이였다.
9.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의 주인은 명나라 천자(天子=황제)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광해군은 이런 말을 하는 사대부들을 매우 언짢게 여겼다.
10. 조선의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은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대외적으로 선포한 건축물이다.
11.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 천자(황제)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자 선정도 명나라가 정해주었다. (조선왕의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12. 명/청나라는 조선의 왕비나 왕태자 폐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정권이 있었다. 조선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지휘 감독하고 있던 것은 명/청나라 대신(大臣)들이었다.
13. 명/청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왕은 고관들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까지 영접을 나가 무릎을 꿇고 사신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연회를 개최하여 극진히 접대해야 했다. 조선 세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명/청나라 사신들에게 예를 올리고 읍소를 했다.
14. 임진왜란시 명군이 파병되자 전작권은 명나라에게 넘어간다. 명나라는 조선을 제외시키고 일본과 전후 조선에 대해 강화협상을 했다. 조선에겐 주권이 없었고 전작권도 없었고 아무런 권한 조차 없었다. 왜냐면 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라서 종주국인 명나라가 강화 협상에 참여하는것을 뒤에서 보고만 있을수밖에 없었다.
15. 금나라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나라 식민지임에 시비를 걸고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16.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청나라는 임금 / 조선은 신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인조는 명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하며 울부짓으며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청나라(오랑캐)의 식민지가 되는것에 대해 자괴했다고 한다.
17. 조선은 동남아, 서양, 인도 등 외국과 직접적인 물자 교역을 하지 못했고 오로지 명나라를 통해서만 대리 교역을 하였다. 왜냐면 명나라가 종주국(명나라)을 통해서만 교역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 조선은 해마다 종주국인 명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고대시대는 독립적인 국가들끼리는 절대로 조공거래는 하지 않았다. 고로 조선은 100% 중국의 조공국이자 속국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19. 조선시대 최고 문인 '송강 정철' 도 자신이 죽자 묘비에 "명나라를 섬기자" 라고 새겨놓았고 속리산 화양동 계속에 명황제 제사를 지내주는 '만동묘' 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명천지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달도 명나라 것이다" 라는 뜻이다.
20.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글이 천한것들이나 쓰는 저급한 언어라고 하였고 사대부들끼리는 명나라 언어로만 대화 하였다. 명나라 유학을 최고의 입신양명의 길로 여겼으며 땀흘려 일하는 노동을 가장 천한것들이 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1. 명나라가 관우한테 제사를 지낼 사당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조선은 즉시 2년만에 동묘/남묘/북묘/서묘를 지어 명나라에 충성을 보였다 (지금도 동묘는 보물 142호)
22. 명나라 군이 8년간 조선에 주둔하면서 닥치는대로 성폭행과 약탈, 살인을 했으나 조선의 조정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명군이 오면 조선농민들은 귀중품을 땅에 묻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조선농민들은 왜군을 더 반겼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23. 숙종은 대보단(大報壇)이라는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지내주는 제단을 만들고 사대부들은 종주국인 명나라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를 한다. 망한지 200년이나 넘게 타국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던 나라는 세계사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였음이 행복했다는 증거다.
24.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에는 '청나라 와의 사대관계 폐지와 독립' 을 촉구했다.
25.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문에서 "독립" 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26.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선언은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27.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였다. 즉, 주변국들(일본, 러시아)도 조선이 청나라의 식민지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기록이다. 고종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계기로 청나라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후 조선은 곧바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첫째,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후협상을 시작했다. 명나라 이여송(하급장수)과 일본육군 총사령관 '고니시 유키나카' 와 단둘이서 조선반도의 전후협상을 했다. 이 회담에 조선인들은 끼지도 못했다. 일본인과 명나라인 단둘이서만 조선반도에 대한 협상을 했다. 명나라는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주장했고 일본측은 경상도와 전라도까지는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일본육군은 3년간 부산에 주둔했고 매일 동네 아녀자들을 잡아다가 씨를 뿌렸다.
둘째, 조선에 와 본적도 없는 일본군이 부산 동래에 상륙해서 한양을 점령하는데 불과 15일이 걸렸다. 일본군을 도운 길앞잡이들이 바로 조선농민들이였다.
일본군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보릿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동안 양반+아전+향리들에게 가렴주구만 당했던 조선 농민들은 일본군이 나누어주는 보릿쌀을 받고 일본군을 대환영했고 일본군 첨병과 간첩으로 활발히 활동 하였다. 조선에선 이들을 ‘순왜’ 라고 불렀다.
셋째, 한양을 방어하는 최후 방어선인 용인전투에서 7만의 조선 관군들은 불과 1600명의 일본 기습대에게 전멸 당한다. 이광, 신익, 곽영, 김수등 조선의 내노라하는 명장들은 졸병옷으로 갈아입고 가장 먼저 도망쳐버린다.
남은 조선 관군들은 우왕좌왕 하다 일본군에게 무참히 도살당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 기습대중 약 600여명이 조선인이였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이들이 왜 일본군에 가담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섯째, 조선은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조선시대 중들은 천민계급이였고 백정과 동급 취급을 받았다. 조정은 중들에게 천민계급을 없애줄테니까 의병활동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중들이 일본육군과 전쟁을 한것이다. 이중 유명한 이가 바로 사명대사다. 사명대사도 조선시대에는 천민계급으로 인간취급도 못받고 개백정들이랑 동급 대우를 받았다.
여섯째,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을 하면서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 을 함경도로 보내 의병을 모집하라고 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에서 매일 아녀자들을 겁탈했으며 기생들과 술에 쩔어 의병모집은 하지도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김수량, 이언우, 함인수, 정석수, 국경인, 전언국이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아 당시 함경도로 진군했던 일본 육군 대좌 '카토 기요마사' 에게 넘겨준다.
국경인은 카토 기요마사에게 '판형사 제북도' 라는 벼슬을 하사받고 함경도 회령을 통치한다. 카토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빌미로 라이벌이였던 ‘고니시 유키나카’ 를 제치고 명나라와 전후협상 회담에 자신이 참석하기를 바랬던 큰 야망이 있었다.
일곱째, 일본육군 총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카' 의 오른팔 장수는 경북청도 출신의 '박계생' 이라는 자였다(김계생으로 개명함). 당시 경상도 지방에선 칼과 무예로는 박계생을 당할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왜 일본군에 가담하여 ‘고니시 유키나카’ 를 모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덟째, 일본군에 협력했던 수천명의 조선농민들이 일본군을 따라 일본(가고시마현)으로 건너간다. 일본 다이묘(영주)들은 조선인을 고려촌(고라이 무라)에서 거주하게 했으며 농사지을 땅과 집을 주었다. 이후 조선 농민들은 일본에 영구 정착한다.
아홉번째, 임진왜란때 '이삼평' 과, 정유재란때 '심당길'이라는 도공이 일본에 끌려왔다. 일본 영주는 조선 도공들(약 160명)에게 사무라이 계급(당시 도공은 조선에서 천민층)을 주고 은화 30냥(현재가치 2억원)과 밭과 집, 여자를 함께 주었다.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에서 귀족 대우를 받고 마음껏 도자기를 구웠으며, 전후 조선통신사를 통해 사명대사가 일본을 직접 방문해 이들에게 조선으로 귀국을 종용했으나 조선 도공들은 귀국을 거부했고 일본에 완전 정착하였다. 현재 심당길의 14대 후손(93세, 얼마전 타계)이 도자기를 굽고 있는데 일본의 중요 무형문화재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가고시마현은 해마다 이삼평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음) 후에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메이지 유신과 함께 포르투칼에 전수되어 유럽 도자기 문화 발전에 기틀을 마련시켜 주었다.
열번째, 일본군이 한양으로 진격해 오자, 궁궐에 있던 관노비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한양성문을 열어 일본군을 반겼다. 한양 공격대 사령관이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는 성문을 열어준 조선 관노비들에게 은화 10냥씩(현재 가치 7000만원) 상금을 내린다, 그런데 그는 기마 추격대를 만들어 의주로 도망치는 선조를 충분히 추격할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하지 않았다는게 의문이 남는다.
국민 팔이 하지마라
이 찌질한 놈아
조국이면 양반이지
가게 문 닫고 피켓들고 교왈이 옆에 서야 하는가..... ?
고민이 고민이....
구속일까요 ?
그런다고 니놈들이 저지른 죄악 용서는 못해준다.
언제일진 모르겠지만 깜빵 가거든 니놈 팔자를 원망하거라.
국민을 구한 난세의 영웅!
글고니따위는..
그러니 함부로 국민의 이름을 더럽히지마라.
하루하고 치우면 진정성이 없다 추석내내해도 관심없다
솔직히 친인척 볼 낯 없지?? 대표라는게 추석전에 할일도 없나..
1. 고려왕조는 스스로 송나라에게 조공과 책봉을 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송나라는 북방 오랑캐들에게 오해를 받을까(고려는 송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셨던 관계) 난감해 했다.
2. 조선은 이성계가 건국하면서부터 명나라의 속국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조선이라는 국호(國呼)도 명나라가 정해준것이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녕' 이라는 두개의 국호를 들고 명황제에게 정해달라고 읍소하였다. 명황제는 아침에 일어나는 나라라고 하여 조선으로 국호를 정해주었다.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대조지은(大造之恩)이라고 칭하였다(명나라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 국호를 타국에서 만들어준 사례는 전세계적으로 조선이 유일하였다.(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증거중에 한가지^)
3. 조선은 공식적으로 '유명조선국(有明 朝鮮國)' 을 통해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자처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유명조선국 = 명나라의 조선국이라는 의미)
4. 조선은 스스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5. 조선은 독자적 칭호가 아닌 '왕' 을 사용했다. 여기서 "왕" 은 황제국인 명나라의 속국중에 왕을 의미했다.
6. 조선 궁궐은 명나라의 문양인 용문양을 새겨넣을 수가 없었다.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였다.
7.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말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주어진 칭호이다. 즉, "명나라의 식민지국으로서 예절을 다한 나라" 라는 뜻이다.
8. 명나라는 조선을 순이(順夷) 라고 불렀다. 명나라에 순종하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여러 속국(북적, 서융, 남만)들중 중원의 한족에게 반란을 일으킨적이 없는 유일한 식민지가 바로 조선이였다.
9. 조선 사대부들은 조선의 주인은 명나라 천자(天子=황제)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광해군은 이런 말을 하는 사대부들을 매우 언짢게 여겼다.
10. 조선의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은 명나라의 식민지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대외적으로 선포한 건축물이다.
11.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 천자(황제)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했다. 세자 선정도 명나라가 정해주었다. (조선왕의 후궁들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해 명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13. 명/청나라 사신이 오면 조선왕은 고관들을 거느리고 영은문(迎恩門)까지 영접을 나가 무릎을 꿇고 사신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연회를 개최하여 극진히 접대해야 했다. 조선 세자는 모화관(慕華館)에서 명/청나라 사신들에게 예를 올리고 읍소를 했다.
14. 임진왜란시 명군이 파병되자 전작권은 명나라에게 넘어간다. 명나라는 조선을 제외시키고 일본과 전후 조선에 대해 강화협상을 했다. 조선에겐 주권이 없었고 전작권도 없었고 아무런 권한 조차 없었다. 왜냐면 조선은 명나라의 식민지라서 종주국인 명나라가 강화 협상에 참여하는것을 뒤에서 보고만 있을수밖에 없었다.
15. 금나라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나라 식민지임에 시비를 걸고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16. 정묘호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청나라는 임금 / 조선은 신하) 관계를 맺었다. 이때 인조는 명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절하며 울부짓으며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청나라(오랑캐)의 식민지가 되는것에 대해 자괴했다고 한다.
17. 조선은 동남아, 서양, 인도 등 외국과 직접적인 물자 교역을 하지 못했고 오로지 명나라를 통해서만 대리 교역을 하였다. 왜냐면 명나라가 종주국(명나라)을 통해서만 교역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8. 조선은 해마다 종주국인 명나라에게 조공을 했다. 고대시대는 독립적인 국가들끼리는 절대로 조공거래는 하지 않았다. 고로 조선은 100% 중국의 조공국이자 속국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19. 조선시대 최고 문인 '송강 정철' 도 자신이 죽자 묘비에 "명나라를 섬기자" 라고 새겨놓았고 속리산 화양동 계속에 명황제 제사를 지내주는 '만동묘' 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명천지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달도 명나라 것이다" 라는 뜻이다.
20.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글이 천한것들이나 쓰는 저급한 언어라고 하였고 사대부들끼리는 명나라 언어로만 대화 하였다. 명나라 유학을 최고의 입신양명의 길로 여겼으며 땀흘려 일하는 노동을 가장 천한것들이 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2. 명나라 군이 8년간 조선에 주둔하면서 닥치는대로 성폭행과 약탈, 살인을 했으나 조선의 조정은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명군이 오면 조선농민들은 귀중품을 땅에 묻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죽했으면 조선농민들은 왜군을 더 반겼다고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23. 숙종은 대보단(大報壇)이라는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지내주는 제단을 만들고 사대부들은 종주국인 명나라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고 맹세를 한다. 망한지 200년이나 넘게 타국을 위해 제사를 지내 주었던 나라는 세계사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조선은 스스로 명나라의 식민지였음이 행복했다는 증거다.
24.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에는 '청나라 와의 사대관계 폐지와 독립' 을 촉구했다.
25.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문에서 "독립" 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26.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 선언은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27.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조선의 청나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였다. 즉, 주변국들(일본, 러시아)도 조선이 청나라의 식민지임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기록이다. 고종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계기로 청나라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시모노세키 조약이후 조선은 곧바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첫째,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후협상을 시작했다. 명나라 이여송(하급장수)과 일본육군 총사령관 '고니시 유키나카' 와 단둘이서 조선반도의 전후협상을 했다. 이 회담에 조선인들은 끼지도 못했다. 일본인과 명나라인 단둘이서만 조선반도에 대한 협상을 했다. 명나라는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주장했고 일본측은 경상도와 전라도까지는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일본육군은 3년간 부산에 주둔했고 매일 동네 아녀자들을 잡아다가 씨를 뿌렸다.
둘째, 조선에 와 본적도 없는 일본군이 부산 동래에 상륙해서 한양을 점령하는데 불과 15일이 걸렸다. 일본군을 도운 길앞잡이들이 바로 조선농민들이였다.
일본군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보릿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동안 양반+아전+향리들에게 가렴주구만 당했던 조선 농민들은 일본군이 나누어주는 보릿쌀을 받고 일본군을 대환영했고 일본군 첨병과 간첩으로 활발히 활동 하였다. 조선에선 이들을 ‘순왜’ 라고 불렀다.
셋째, 한양을 방어하는 최후 방어선인 용인전투에서 7만의 조선 관군들은 불과 1600명의 일본 기습대에게 전멸 당한다. 이광, 신익, 곽영, 김수등 조선의 내노라하는 명장들은 졸병옷으로 갈아입고 가장 먼저 도망쳐버린다.
남은 조선 관군들은 우왕좌왕 하다 일본군에게 무참히 도살당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 기습대중 약 600여명이 조선인이였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이들이 왜 일본군에 가담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넷째, 선조가 의주로 도망칠때 개성에서 윤두수라는 자에게 묻는다 "적병의 절반이 조선인이라는데 사실이더냐?"
이에 윤두수는 벌벌떨며 고개를 숙일뿐 아무말도 못한다 (선조실록 26권中)
다섯째, 조선은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조선시대 중들은 천민계급이였고 백정과 동급 취급을 받았다. 조정은 중들에게 천민계급을 없애줄테니까 의병활동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중들이 일본육군과 전쟁을 한것이다. 이중 유명한 이가 바로 사명대사다. 사명대사도 조선시대에는 천민계급으로 인간취급도 못받고 개백정들이랑 동급 대우를 받았다.
국경인은 카토 기요마사에게 '판형사 제북도' 라는 벼슬을 하사받고 함경도 회령을 통치한다. 카토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빌미로 라이벌이였던 ‘고니시 유키나카’ 를 제치고 명나라와 전후협상 회담에 자신이 참석하기를 바랬던 큰 야망이 있었다.
일곱째, 일본육군 총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카' 의 오른팔 장수는 경북청도 출신의 '박계생' 이라는 자였다(김계생으로 개명함). 당시 경상도 지방에선 칼과 무예로는 박계생을 당할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왜 일본군에 가담하여 ‘고니시 유키나카’ 를 모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여덟째, 일본군에 협력했던 수천명의 조선농민들이 일본군을 따라 일본(가고시마현)으로 건너간다. 일본 다이묘(영주)들은 조선인을 고려촌(고라이 무라)에서 거주하게 했으며 농사지을 땅과 집을 주었다. 이후 조선 농민들은 일본에 영구 정착한다.
아홉번째, 임진왜란때 '이삼평' 과, 정유재란때 '심당길'이라는 도공이 일본에 끌려왔다. 일본 영주는 조선 도공들(약 160명)에게 사무라이 계급(당시 도공은 조선에서 천민층)을 주고 은화 30냥(현재가치 2억원)과 밭과 집, 여자를 함께 주었다.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에서 귀족 대우를 받고 마음껏 도자기를 구웠으며, 전후 조선통신사를 통해 사명대사가 일본을 직접 방문해 이들에게 조선으로 귀국을 종용했으나 조선 도공들은 귀국을 거부했고 일본에 완전 정착하였다. 현재 심당길의 14대 후손(93세, 얼마전 타계)이 도자기를 굽고 있는데 일본의 중요 무형문화재로 추앙받고 있다. (지금도 가고시마현은 해마다 이삼평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음) 후에 조선의 도자기 기술이 메이지 유신과 함께 포르투칼에 전수되어 유럽 도자기 문화 발전에 기틀을 마련시켜 주었다.
군대나 다녀오세요
정치란 최악과 차악중 차악을 선택 해 가는거다..
문재인 조국 쪽이 싫으면 황교안 나경원이 당선 되겠지...
젊은 애들아 페미? ㅋㅋㅋ 또 뭐냐 아 모르겠고 정작 페미들은 문재인 싫어 하던데 ㅋㅋ
여하튼 황교안이 당선 되면 페미 걱정이 아니라 그냥 자기 목숨 걱정 하는 나라 올꺼야 어게인 갑질 시대 ㅋ
아..일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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