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넷플릭스에서 은교를 봤습니다
책을 읽고 감동과 공감을 많이 했던 저로서는
영화" 은교" 에서는 미묘한 분노마져 생깁니다
아래글은 예전에 책을 읽고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여봤었던 독후감입니다
내용도 길고 별 쓰잘데기 없는 내용일수도 있으나
자유게시판이이니 자유로옵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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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샌가 현대에는 육체적인 관계의 사랑만이 모든것이고 절대적이라 생각하고 있는건 아닐까.
처음 책을 읽기시작할때는 심히 냉소적이었다.
단순한 이목집중 영화화 되어있는 소설들이 그러하듯 단순한 관심끌기와 흔한 판매 부수 올리기의 흔하디 흔한 내용일듯했다.
영화 광고만 보는것으로도 이미 내용의 80% 이상은 알수있는 스포일러들
하지만
중반이상읽었을때 뭔가 변하기 시작한다.
흔히 예상하는 금단적 사랑이라거나 노인과 청소년의 과한 성관계 이런건 일절없었다.
제자인 ' 서지우'는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희생적이고 봉사적인 그러면서도 헌신의 상징.. 이라고 초반부에는 믿었었다.
하지만 그속에 숨겨지 불꽃들은 정말 처절하리만큼 애절했다.
사랑하는자에게 버려진 마음
사랑하니까 상처줄수밖에없는마음
그가 사랑했던 이적요 시인에게 버림받있다고 확신한 순간
그의 내면에서는 어떠한 불꽃이 피어올랐을까?
흡사 서지우는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일곱...
분명 내 첫사랑이 그나이였지 라는 독백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Q변호사의 독백처럼 은교는 월등히 아름답지도 청순하지도 않은 그냥 그나이 또래의 평범한 여자아이 였다.
최근 집사람이 우연히 첫사랑 사진을 보고 했던이야기.
그냥 평범한 아줌마네.
왜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왜그리 저돌적이고 공격적이었을까
서지우와 은교와의 관계는 흡사젊은 연인들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생각된다.
반대로 이적요 시인과 은교의 관계는 멘탈을 중시하는 노부부의 사랑 그것을 상징하는듯하다.
오히려 극중 서지우와 은교의 통화중에 아저씨는 할아부지보다 더 늙었다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은교가 중시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사람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들한다.
가장간단하면서 어려운일.
서로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서로의 불균형을 균형에 가깝게
단 1% 라도 서로를 이해하기위해 조금이라도 타인과 부대끼고 살야하하는 그런게 인간이 아닐까?
이적요 시인이 자신이 자기의 제자를 죽였다고 인식함 순간부터 그는 급격하게 늙어간다.
이미 병마가 몸을 덮치고 노쇠한 육체에 오직 서지우 와 은교와의 대화가 그의 멘탈을 더욱 맑고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티비 광고에 나오는 은교의 티져영상은 마치 스승과제자 그리고 여고생과의 심각한 삼각관계를 농후히 그려낸 영화인듯광고 하곤한다.
편집의 힘이다.
오히려 이런부분에 거부감을 느끼고 불결하다고 생각한다면
해줄수있는 말은 한가지 끝까지 보거나 읽어라 이다.
기왕이면 책을 추천한다.
영상의로 현실화된 영화는 중요한 상상력을 빼았기 때문이다.
실지로 이책을 읽는동안에 야설좀 그만봐라 라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왜? 이게 외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진않다.
그릇이 지저분해 보인다고 내용물이 썩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선입관이 아닐까?
작가는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그리고 은교 세사람의 관계를 어떨때 대립하는 연인들처럼.
어떨땐 할아버지 아버지 딸의 가족처럼 절묘하게 그려내고있다.
그속에 숨겨져있는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함을 깨달은 이적요시인과 서지우의 내면표현은 서로 다른 두 타인이 은교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다른 행도을 보이는 것으로.
타인이니까 같은걸 보더라도 다른 행동을 할수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건 아닌지 조심히 생각해본다.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지듯
서지우와 이적요 시인의 대립과갈등역시 서서히 서서히 고조된다.
이적요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숨겼다고 묘사한다.
반면에 서지우는 선생님의 눈빛에서 살기마저 느껴진다 하고 서술한다.
심화된 갈등에서 서로는 서지우가 혹은 이적요시인이 자신을 죽이러 오는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장면에서는 안티깝기 까지 하다.
왜 그들은 서로 터놓고 대화를 못했을까.
이적요시인은 서지우에게있어서는 신적인 존재로 명시된다.
불가침의 영역 그 엄청난 존경심때문에 더 말을 못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과 은교와의 관계에 대한 도덕적 죄책감을 자신의 더럽고 추하다고 여기는 모습을 자신의 사랑하는 선생님에게 차마 표현할수없었던걸지도 모른다.
최후의 순간에 이적요 시인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은 서지우는 오열한다.
사랑하는사람이 차를 탔었는데 차상태를 확인해달라
정비소에서 그렇게 말하고 문제점을 깨달운 서지우는 과연 얼마의 절망감을 느꼈을까.
변호사와 은교가 서지우의 사망원인을 조사할때 나온결론은 그것이다.
눈물
눈물이 서지우를 죽였다.
사랑하는 선생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그를 죽였다.
그리고 이적요 시인은 병마에 의해 죽은 것이지만
분명 서지우를 잃기전과 후의 건강상태는 모든것을 말해주고있다.
아들보다도 극진하던 자기의 제자를 자기손으로 죽였다.
너무도 가까웠기에 서로에게 깊은 절망감을 줘버린 두사람
객괸적으로 보면 이모든것에 은교가 개입되어있고 은교가 없었다면 이렇게 절망적인 결말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은교는 서지우와 이적요시인의 노트를 태워버린다.
이적요시인과 서지우 둘이 같이있을때 질투심을 느꼈다. 자신이 비집고 둘어갈 틈이 없었다 라고 말하는은교는 이적요 시인의 노트를 태우면서 오열한다.
할아부지가 자기를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는지 몰랐다고.
그럼 알았다면?
조금더 훈훈한 끝이 났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순수한 감정은 너무나 새하얘서 때묻기도 그만큼 쉬운법이다.
어느덧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 이라거나. 그것이 말하고 있는 헌신적인 봉사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단순히 손을 잡는것 만으로도 떨리고 설레는 감성을 잊고 사는건아닌지.
단순히 눈길만 닿아도 설레는 감정이 잊혀져 가는 것이이 아쉬울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서지우라는 인물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어쩔수없는 것 같다,
20대초반의 나의 실수들을 보는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온다.
연애에 있어서 상당히 강압적이었던나.
그러면서도 나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눌러앉아버린점에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헤어진 다음에도 그렇게 1000일이라는 시간을 자책하면서 보내왔던 나의 실수들을
서지우는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더욱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적요 시인에게 있다.
사회의 체계자체에 냉소적이고(특히 문학세계쪽에)
너희;들은 철저히 계획된나의 행동에 깜박 속은거다.
엿이나 먹어라
라고 외치고 있는그는
서지우의 표현을 빌자면 고귀하고 고귀한 범접할수없는 존재
그런 그가 열일곱 의 평범한 여자애에게 흔들린 이유는 무엇일까
실상 은교는 이적요 시인의 표현대로 순수하고 깨끗하지만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은교를 나의 처녀 라는 표현을 빌어가면서.
은교에대한 욕정을 억누르고 억누른다.
이후 감정이 폭발했을때도 은교에 대해서 만큼은 조심스럽다.
너무 소중하니까.
은교를 안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니까
지키는 사랑 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은교 본인조차도 쉬이 눈치채지못할 그러한 사랑
퇴근하구선 잠든 집사람을 잠시 바라보면..
나는 당신을 얼마나 지켜줄수있을까.
내안의 짐승이 분노하고 당신에게 큰소리로 외칠때.
과연 나의 이성은 얼마까지 당신을 지킬수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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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미성년자와 관계하면 강간이다 아니다
이야기가 있었죠
그거 보면서 은교가 생각났습니다
인간은 본인이 하는행위가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제어할
이성이라는걸 가지고 있는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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