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쓴 글인데 틀린 정보 수정하고 내용 보충하려 집에 있는 낡은 컴퓨터로 수정하니 글자가 다 깨어지더군요. 내용 조금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다 아시겠지만 국내에는 몇몇의 외래 성씨가 있습니다. 몽골계인 연안 인씨(延安 印氏), 여진계인 청해 이씨(淸海 李氏), 위구르계인 경주 설씨(慶州 卨氏), 아랍계인 덕수 장씨(德水 張氏) 그리고 한월 수교로 한때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한 월남 왕족 출신의 화산 이씨(花山 李氏), 그리고 일본계인 우록 김씨(友鹿 金氏 : 사성 김해 김씨)가 있으며 그 외 현대에 들어와서는 각국에서 귀화하여 생긴 많은 외국 성씨(또는 창씨)가 있지요.
뜬금없이 외래 성씨를 소개한 이유는 최근 발생한 중국내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테러에 관련된 얘기를 해볼까 해서입니다. 뭐 일부에서는 민간인이 아닌 특정 군인을 공격한 것이라 테러가 아니라 군사 공격으로 보자는 분들도 계시지만 이 부분은 여기서 논외로 하겠습니다.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이 자치구는 중국 서북부에 위치하며 면적이 166만4900㎢로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에 달하며 러시아, 몽골,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8개국과 접경하고 있습니다. ‘서역(西域)’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고 실크로드의 3대 노선이 모두 이 지역을 지난답니다.
가끔 대한항공이나 다른 여행사 달력에서 볼 수 있는 붉은 황량한 배경에 절벽과 이국적인 불상, 불탑 이런 풍경을 생각하시면 되는 곳입니다. 중앙아시아의 풍경과도 유사하고요.
이 지역의 주인인 위구르족은 몽골 고원에서 발원했다고 되어있으며,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돌궐)계 민족으로 나와있습니다. 아래 덧붙일 자료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찾아보시고... 암튼간에, 이 지역이 신장이라고 불리운 데에는 1884년 청나라 때 건륭제가 ‘새로운(新) 영토(疆)’라는 뜻으로 지명을 붙여서 그렇답니다. 즉, 근현대 들어서야 중국 영토에 편입된 것이지요.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 지역이 기원전 59년 한조(漢朝)가 서역도호부를 설치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조가 서역도호를 임명한 이래로 신장은 중국에 불가분의 구성 부분”이라고 주장한답니다. 그 후 당조에는 안서 도호부를 설치하기도 하였지요.
왠지 저 관청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으신지요? 역사에 무지한 제가 깊이 알리 없지만, 우리 땅에도 "도호부"가 있었던 적이 있지요. 안동 도호부라고, 시대는 조금 틀리지만 고구려 멸망후 당에 의해 평양에 설치된 관청이 있었지요. 설인귀를 안동도호로 임명하였다는데 모 드라마에도 나왔던것 같군요. (전사모가 좋아할라...)
그리고 고구려 유민 출신인 당(唐)의 고선지 장군이 서역 원정으로 전투를 하였다고 하니 어떻게 본다면 우리 역사에도 잠시 등장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고선지 장군이 740년경 병력 2,000명을 이끌고 톈산[天山] 산맥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 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기도 하였다니깐요. 탈라스 전투에서 패퇴하긴 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당대 최고의 중국의 기술이 아랍으로 전파되기도 하였다는데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안동/안서 도호부라는 이 이름이 저 머나먼 남쪽 월남에도 등장하는데, 유사한 시기에 월남을 정복한 당에서 안남 도호부를 설치하고 비엣족(越족)을 지배하였다고 합니다.
아시아인의 역사에 무지한 프랑스인들은 이 "안남"이라는 명칭을 중부 월남 지역에 사용하였는데(주: 북부는 통킹(東京) 중부는 안남(安南) 남부는 꼬샹쉰느(코친차이나)라고 불렀음), 이는 식민지 지배자가 부른 명칭이며 제가 아는 월남인들은 안남이라는 이름을 국호로 사용하지 않더군요. 암튼, 우리가 아는 안남미도 이 때 생긴 명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역사는 흐르고 흘러 1000여년이 지나, 그나마 독립 국가로 남은 나라는 안동 도호부와 안남 도호부 뿐이군요.
중국의 중화민족 정책과 각종 공정(프로젝트)로 인해 중국 역사와 그 주변 국가역사의 교집합 부분은 모두 중국사가 되는 요즘에 "도호부"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누구는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고 다른 누구는 진보한다고 그러지만 어쨌든 우리와 가까이 사는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이 1000여년전 이 땅에는 없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지, 아니면 다시 수십년 후에 우리가 그러하게 되진 않을지, 더위 먹은 생각에 빠져봅니다.
현실적으로 위구르족의 독립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 넓은 땅에 적은 인구 그리고 많은 자원들, 동 투르키스탄 지역의 군사적인 기능까지, 중국이 놓아줄 수 없겠지요.
과거 어느 시점에 위구르족의 일부가 이슬람화 되지 않고 중국내 민족으로 녹아 들었다는데, 앞으로 올림픽이 끝나면 다들 관심에서 멀어지겠지만 그래도 이 위구르족의 투쟁에 관심이 가는군요. 민족적 대의를 달성할 지 아니면 티벳이나 다른 미독립 소수민족처럼 자치권 확대에 치중할지는...
혹시 아시나요? 여러분들 며느리나 사위로 언젠가 콧날 오똑하고 눈망울이 큰 경주 설씨의 사람이 들어올지...
두서 없는 제 글은 이만 줄이고, 백과 사전 지식을 참고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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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족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으로 현재 중국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민족이다. 스스로는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744년, 위구르족은 바스밀(Basmil), 카를룩(Qarluq) 등의 부족과 함께 후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외튀켄(Otuken)산에서 위구르 제국을 세운다.
중국뿐 아니라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몽골, 우즈베키스탄, 독일, 터키 등에도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뿐만 아니라 후난성의 타오위안 현(桃源?)에도 살고 있으며, 북경이나 상하이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작기는 하지만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와 워싱턴 D.C.에도 위구르족 공동체가 있으며, 캐나다의 토론토와 밴쿠버에도 살고 있다.
외모는 다양해서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들과 유사한 경우도 있지만, 유럽인처럼 피부가 흰 위구르인들도 있다.
[제국 이전의 역사]
위구르족의 조상은 유목 가오체(高車, 고거)족이다. 타림분지에 살았던 토카라(Tocharians, 月氏)족 역시 위구르의 조상에 포함된다고 보기도 한다. 가오체의 이름은 천막을 옮기기 위한 소가 끄는 수레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들은 바이칼호 남쪽 협곡과 예니세이 강 일대에 사는 알타이계의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약간의 농업과 예니세이강 유역의 풍부한 철광석을 바탕으로 금속문화를 발달시켰다. 이후 흉노에 복속되어 무기를 제공하였으며 이후 유연과 에프탈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450년 가오체는 유연에 반란을 계획하였으나 유연 지배하의 투르크족에 패배한다. 이 사건은 돌궐제국을 오래 괴롭힌 역사적인 투르크와 ?p레스(鐵勒, 철륵)간 원한의 시작이었다. 돌궐이 유연/에프탈을 패배시켰을때, 그들은 ?p레스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다.(이 시기에 고거족의 이름은 ?p레스로 바뀐다.) 이 시기에 위구르는 처음으로 중국의 사서에 바이칼 남쪽 지역의 10,000호의 작은 부족으로 기록된다.
?p레스 부족연맹이 와해되자, 위구르는 중국의 수나라와 연합한 설연타(薛延陀) 연합에 참여하며, 타르두한을 꺾고 독립을 쟁취한다. 이 연합은 603년부터 당태종이 돌궐제국에 결정적 타격을 준 630년까지 그 자치의 정도를 달리 하며 존재했다. 이 시기에 위구르는 연합 내에서 설연타 다음의 지위를 점유하였다. 전돌궐과 후돌궐의 사이 공백기인 630년에서 683년 사이 위구르는 설연타를 무너뜨리고 부고(僕固), 동라(同羅), 바이르쿠(拔野古) 등 다섯 부족들과 함께 위구르 연합을 구성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중국 측천무후의 재위기간에 후돌궐이 세워지고, 위구르는 다른 유목 터키계 부족들과 함께 후돌궐 제국에 참여한다. 후돌궐 제국은 734년 빌케가한(毗伽可汗)의 사망 이후 그 세가 기울게 된다. 위구르는 중국 동맹국들과 연합한 일련의 반란 뒤에 9개 부족이 연합한 토쿠즈-오구즈(Toqus-Oghuz)라는 부족연맹을 통합하여 새로운 동맹세력, 온 위구르(On-Uygur)의 지도세력이 된다. 744년, 위구르는 바스밀(Basmil), 카를룩(Qarluq) 등의 부족과 함께 후돌궐 제국을 멸망시키고 외튀켄(Otuken)산에서 위구르 제국을 세운다.
[제국의 역사]
오르혼 제국은 745년 쿠틀루그 빌게 카간(Kutlug Bilge Kagan, 骨力裵羅)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840년까지 만주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하였다. 제국은 오르혼강 유역의 스텝지역을 지배하였으며 수도는 오르두 발리크(Ordu Baliq)였으며 카라발가순(Kara Balgasun)으로 알려졌다. 위구르는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757년 안사의 난으로 중국 당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수도 장안에 진군하여 구해주기도 한다. 759년부터 779년까지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762년 뵈귀(Bogu) 카간은 페르시아계 소그드인에게서 전파된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점차 유목적 성격을 잃고 정착 농경사회로 탈변한다. 결국 군사력이 약해진 위구르 제국은 840년 다른 터키계 민족인 키르기즈(Kyrgyz)에 의해 멸망한다.
[현대 위구르]
이디쿠트
위구르 제국의 멸망에 따라 위구르의 난민들은 간쑤, 신장, 톈산 산맥 서쪽 추이 강 유역에 정착하였다.
서쪽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중가리아 분지와 타림 분지에 살던 다른 투르크계 부족과 함께 베쉬발릭-투르판-쿠차 왕국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인도유럽어족인 토착 토카라인들과 융합되었다. 이는 현재의 위구르가 투르크계뿐 아니라 인도유럽어족을 유전적/문화적으로 계승하고있는 이유이다.
유고르 세개의 위구르 지역중 동쪽에 있었던 나라는 간수 왕국(870- 1036 CE)이다. 수도는 현재 중국 간쑤 성의 Zhangye 였다. 위구르는 이때 마니교에서 라마교로 바뀌었다. 서쪽의 다른 투르크계 사람들과 다르게 이들은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들의 후손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인 유구르족이며 현재 위구르족과 분리되었다. 1028년-1036년의 혈전에서 유고르는 탕구트 왕국에 강제 흡수되었다.
카라코야 세개의 위구르 지역중 중앙에 있던 나라는 카라코야 왕국(856-866 CE 사이 건국)이며 이디쿠트(신성한 부, 영광) 라고도 불렸다. 겨울의 수도인 투르판과 여름의 수도인 베쉬발릭, 그리고 쿠물, 쿠차에 기반한 불교국가였다. 이들은 위구르 문화의 중심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디쿠트(카라코야 왕국 지배자의 호칭)는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에게 복속되는 1209년까지 독립적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중국에서 981년 황옌더를 사절로 보내 정주시킬만큼 이들은 확고한 국가를 완성하였으며 몽골 제국에 복속된 이후에도 영주국가로서 1335년까지 유지된다.
카라카니드 세개의 위구르지역중 서쪽에 있던 나라는 카라카니드 왕국이며 카라한(위대한 칸의 왕조)이라고 불렸다. 카라한은 840년 이후 추이 강 계곡에서 위구르족에 의해 발흥하여 940-1212년 사이에 투르키스탄과 Maveraunnehir에서 존속했다. 934년 술탄 Satuq Bughra 칸(920-956)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으며 940년 카를룩의 도움으로 무슬림 협회와 연방을 건립했다. 사마르칸트의 사만조와 함께 그들은 스스로를 불교 위구르(이디쿠트)와 불교 스키타이-토카라 호탄왕국에 맞서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여겼다. 카라한의 첫 수도는 추이 강 계곡의 발라사군이었으며 이후 카슈가르로 옮겼다.
카라한의 군림은 투르크 문화와 예술의 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기간동안 모스크와 학교, 다리, 그리고 카라반의 숙사가 지어졌다. 카슈가르, 부하라, 사마르칸트는 배움의 중심이 되었고 투르크 문학이 발달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Yusuf Balasaghuni의 1060년대 작품인 《Kutadgu Bilig》 (한국어: 행복을 주는 지식)이 있다.
이디쿠트과 카라카니드 모두 훗날 야율대석의 서요에 의해 멸망한다. 이란에서 셀주크 제국이 발흥한 뒤에 카라카니드는 이름뿐인 속국이 된다. 이후 카라카니드는 서요와 셀주크 제국에 이중종주권을 바친다. 이 세 지역은 모두 1209년 칭기즈 칸에게 점령 당한다.
베쉬발릭과 투르판 지역의 거주자들은 15세기 야르칸드 칸국의 세력 확장때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이슬람으로의 개종 이전에 위구르인들은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네스토리우스교였다.
차가타이 한국
1346년 차가타이드 통치자 카잔 칸의 사후 차가타이 한국은 서쪽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의 서차가타이 한국과 동쪽의 모굴리스탄/위구르스탄으로 나뉜다. 서차가타이 한국은 각 부족의 지도자(아미르)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아미르들에 의해 임명된 칸은 실권을 잃은 허수아비였다. 동쪽에서는 투글리크 티무르(Tughlugh Timur, 1347-1363)가 실권을 장악하고 모굴리스탄을 세운다. 이슬람 국가인 모굴리스탄은 투글리크 티무르 재위때에 1360년, 1361년 두차례 서차가타이 한국을 침략하여 일시적으로 정복했었다. 전성기에, 그는 시베리아의 이르티시 강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까지, 트란스옥시아나부터 타림 분지까지 장악했었다.
투글리크 티무르는 부족의 지도자들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1363년, 그의 죽음 뒤에 트란스옥시아나는 카라운의 수장인 아미르 후사윤에게 탈환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아미르 후사윤에 맞섰다. 1366년 그는 사마르칸트를 장악하였고, 1370년 그는 공식적으로 차가타이 칸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미르로 알려졌다. 30년간 티무르는 차가타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 페르시아의 시라즈, 이라크의 바그다드, 인도의 델리,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등을 정복하였다. 앙고라의 오토만 투르크를 정복한 뒤에 티무르는 1405년 중국으로 진군하던 중 사망하였다. 티무르 제국은 그의 아들 샤 루흐에 의해 계승되었고 1447년 사망때까지 재위하였다.
1369년, 서차가타이 한국은 몽골 제국을 재건하려는 티무르에게 점령당했다. 모굴리스탄은 차가타이드의 통치 하에서 티무르 제국과 동맹을 맺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했다. 결국 17세기, 모든 차가타이 영토는 준가르의 갈단을 끌어들인 이슬람계 종교 귀족인 백산당의 아팍 호자와 그의 후손들에게 장악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와 동투르키스탄의 타림분지는 이후 모굴리스탄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배계층인 모골(몽골)족의 이름을 딴 것이며, 인도의 무굴 제국을 세운 통치계층과 같다.
1600년대 이후
만주족은 1644년 청나라를 세웠고, 이는 광대하게 확장되었다. 청나라는 몽골, 동투르키스탄,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만주족은 동투르키스탄을 1759년 침공하였으며 1864년까지 지배하였다. 이 기간동안 위구르인들은 42차례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1864년의 독립운동에서 뒤구르는 동투르키스탄에서 만주족을 쫓아내고 카슈가르 왕국을 세운다. 야꿉 벡의 지도 하에서 이들은 카슈가르, 야르칸드, 호탄, 악수, 쿠차, 코를라, 투르판을 포함하였다. 이 왕국은 1872년 제정 러시아에, 1873년 오토만 제국에, 1874년 대영제국에 의해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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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서는 전 세계의 지리적 문화적 중심지역이었던것 같기도 합니다. 네 문명권의 중심에 위치한... 암튼 위구르 인들의 독립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