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홍범도 장군님의 유해송환 관련 소식을 듣고
생각나는게 있어 몇글자 올려봅니다.
------------------------------------------------------
고려인은 구 소련 시절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사할린으로 이주해서 정착한
조선인들입니다.
사실 구한말 시절 부터 함경도 이북 사람들이 연해주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고
러시아 땅은 일제의 국권 침탈후 독립운동가들의 피난처 역활을 했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러시아 군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당시 독일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러시아 병사의 육성이 독일 박물관에 녹음되어 남아있는데
조선인 부대의 군가를 들어보면 대충 아래와 같은 내용입니다.
을지문덕, 이순신처럼 열심히 싸워 베를린을 점령하여 러시아에 은혜를 갚고,
전쟁 경험을 살려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해방하자.
迪倫님의 아래 블로그에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http://dylanzhai.egloos.com/3518061
이후 10월 혁명과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의 성장과 함께, 시베리아와 연해주는
재소련 조선인의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연해주에서 잘 정착하다가 1930년대 후반 갑자기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된 원인은 자의 보다는 타의 ,
즉 스탈린 시절 소련 정부의 강제 이주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 당시부터 뒤에서 이런 저런 테러와 음모에
많이 가담하다보니 의심병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적백 내전을 겪다보니 더 심해졌고
과거 프랑스 혁명 이후 일개 장군이었던 나폴레옹이 벌인 반혁명 쿠데타가
러시아에 재현될까 두렵다 보니 자신의 볼쉐비키 정권 휘하에 있던
소련군과 황제정주의자들에 대한 불신과 의심은 깊었고
급기야 1930년대 후반의 소련군 대숙청으로 치닫고 맙니다.
특히 구 적백내전 당시 백군에 몸 담았던 황제정 주의자들은
국내에 없으면 해외로 스파이들을 보내서
현장에서 살인 또는 납치를 통해 해결했습니다.
더군다나 어설픈 대규모 집단농장 시행으로 인해 발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학살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봉기 등이 터져나오자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국들이나 소수 민족들의 반란에 대해서도
유달리 히스테리에 가까운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 우크라이나에 대한 탄압은 1941년 나찌독일군이 소련으로 쳐들어와
우크라이나를 점령했을때 처음에는 해방군으로 환영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나찌독일군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짐승 취급하는걸 겪어보고 정신차립니다만 ,
현재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크다고 합니다.
지금도 말 많은 크림반도 사태를 보면 그게 보이죠.
지금의 중국과 같이 소수민족 반란에 대해서는
바로 즉각적인 탄압을 하던가 ,
반란을 안하더라도 없는 증거라도 만들고 누명을 쒸워 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2차대전 직전까지 군부와 소수민족들에 대한 불신과 숙청은
끝도 없이 이어진거죠.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한 연해주 지역에 집단 거주하며
수많은 대일 독립투사들을 지원하던 우리 고려인들 또한
스탈린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은 물론이요 적백내전 당시 백군편에 붙어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하고 시베리아까지 쳐들어왔던
일본의 피식민지 주민인 고려인들 중에 일본의 첩자가
아예 없다고 보장할 수 없었으니까요.
결국1937년 9월 중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연해주에는 여행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고려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
그해 11월 새벽 갑작스럽게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져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수십만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 아시아의 허허벌판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추방되거나 유배되고
이주 도중 정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경천, 김단야, 박진순 등 한국의 대표적인 재 소련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일제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1937~1938년 사이 벌어진
대숙청 시기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1937년 고려인 17만 2481명이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고
(우즈베키스탄 7만6526명, 카자흐스탄 9만5256명), 1938년까지 4만 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 약간 옆으로 세는 이야기를 하자면 ...
재일 망명 통일운동가이신 정경모 선생이 과거에 발행하고 창작과 비평을 통해
1980년대 말 국내에 소개된 씨알의 힘 에는 이 당시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 묘사해서
고등학생이었던 저 조차도 고개를 돌리며 제가 사서 보던 그책 그 문단에
빼곡히 반론을 적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정경모 선생은 잘 모르셔서 그랬을거라 보며 제가 아직도 존경하는 분 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잡초만 무성한 허허벌판에 고려인들을 던져놓고
알아서 살아라~ 농사를 지으면 모두 소비에트 집단 농장에 바쳐라~ 라고 했습니다.
나무 조각과 맨손으로 땅을 파서
나무 조각 , 짚푸리와 나뭇가지로 얹어 움막을 지으며 살면서
맨손으로 똥을 퍼서 밭을 일구었습니다.
이때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만 ,
우리 민족 특유의 성실함과 영리함으로
소비에트 연방 최고의 집단농장으로 만듭니다.
특히 김병화 선생의 타슈켄트 북극성 집단농장은
소련에서 2번째로 급수가 높은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을 정도로
최고의 집단농장이 되었으며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 방문 시 .
김 대통령이 김병화 농장을 직접 방문하여
1994년 6월 5일 KBS 9시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뉴스 링크 http://mn.kbs.co.kr/news/view.do?ncd=3740717#share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님 ,
그분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신다하니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그분의 분통함과 황망함을 이제서라도 조금이라도 씻어 드려서
잘된 일입니다.
더불어 탐관오리와 일제의 수탈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와
정착해서 먹고 살기 빠듯한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급기야 중앙아시아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
동토의 땅 황무지에서 잡초처럼 버티시며 황금 벌판을 일구셔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드높혀주신 고려인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KBS 뉴스에서 올 1월초 , 방송한 11분 짜리
연해주 임시정부 100년 , 고려인의 통일 바라기
영상으로 마무리 합니다.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뭉클해지네요.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