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머니가 몇명이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친모라는 분은 저를 낳고 퇴원하는길에 포대기로 대충싸서
대문앞에 내려놓고 가셨다고... 친척들에게 그렇게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어머니 한분은 유치원 하원하고 집에오면 100원을 부뚜막에 놔두고 갑니다 "이걸로 라면끓여먹어" 당시 안상탕면이 100원이었기에 라면을 끓여먹기보다는 부숴먹기만 했었죠
그리고 나중에는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힌채로 마당에 질질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게되고 어느순간부터는 집에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아버지의 등은
참 저에게는 공포의 존재이면서 동경의 대상이엇던거같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술버릇은 때리고 부시고 깨는 그런장면들과
고려당에서 사오시던 케잌과 같은 달콤함 그 상반된 이미지가 겹치는 일이 많았기에 더 두렵고. 더 그리웠습니다
어느순간부터 새로운 어머니가 왔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오랜기간 어머니 라고 불렀던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발표하는 시간이있었습니다
당시에 읽었었던 책들의 표현중에
"당신을 만나서 너무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라는 구절을 인용을 많이 했었고
" 당신이 처음 우리집에 왔을때는 거부감도 많았고. 두렵기도 했지만 여차저차해서 이제는 엄마라고 자연스럽게 부를수있게됬습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였고... 수업시간에 발표하고 칭찬도 많이 받았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진심이 잘 전해질거같다고 했었기에...
그래서 그 편지를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그날 엄청혼났습니다 쪼끄만게 어디서 당신이란 단어를 건방지게 쓰냐고 ....
배다른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유치원다닐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죠
하루는 제 하교시간에 집앞골목에서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동생을 봤습니다 마침 어머니는 미리 나와계시지 않았기에
제가 픽업을 하게됬었죠
하원시키는 선생님이 저보고 누구냐고 물어보길래
" 얘 형이에요 "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날도 엄청 혼났습니다
니따위가 뭔데 감히 형이라는 소리를 하냐고
동네 부끄러워서 어떻게 사냐
누가 물어보면 삼촌이라해야지 그게 당연한거아니냐
그래서 일까요
저는 동생에게는 그냥 형이라기보다는 젊은 삼촌같은 이미지 였나봅니다
집에서 중학생때 샴푸로 머리감는다고 건방지다고 혼나고
주말에 제방에서 잠들었다고 혼나고
나중에 성인이되고는 망상장애 라거나 공황장애 같은 증상도 있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계속 환청이 들리거나 집에 칼든괴한이 침입할거같은 불안감에 휩쓸리거나 ...
결국은 독립을 핑계로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 입대를 하고.... 병사생활을 하다가 직업군인으로 생활하다가
손가락 절단상을 입습니다
당시 수술하려면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부모님 연락처를 묻기에
" 내 보호자는 국가입니다. 수술동의역시 제보호자인 저희부대 선임에게 받으시면 됩니다" 라고 우겼습니다
집에 연락을 하지 않은게 몇년인지 기억도 나질 않앗고. 연락처에서 지워진지 오래였기에 기억도 없었습니다
결국은 부대선임이 물어물어 부모님께 연락이 닿았고
여전히 아버지는 말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의가사 전역을하고
결혼을하고
자녀가 생겼을때...
" 니 새끼들 시댁에 맡기니 어쩌니 그런소리 하지마라. 나는 니 새끼들 봐줄생각 털끝만큼도 없다"
어머니의 덕담은 그러했습니다
대략적인 친정의 상황을 듣고나서 나온말이기에
범죄자인 장인을 둔 내죄다 생각하고 그냥 웃었습니다
이후 2호점 까지 개점했던 사업은 코너로 입점한 마트 점주의 야반도주와 파산 크리티컬이 터지면서 한방에 물거품이됩니다
집 전세금을 빼고. 대출을 영혼끝까지 땡겨서 겨우겨우 지금의 가게를 구합니다 인테리어 할 돈이 없어서....
그냥 나무 쪼가리. 각목. 합판 덧대서 대충 장사만 할수있게 혼자 인터리어를 한다고 깝쭉거렸습니다
' 지나가다가 이 더운데 고생하는거 생각하니까.
니는 밥도 제때 잘안챙겨먹데. 이거나 묵고 해라"
이러시면서 김밥한줄을 놔두고 가셨습니다
뭐라 말할사이도 없이 어머니는 그렇게 그냥 가셨습니다
나중에 전화로 인사드리면서...
" 어머니... 제 주위에 저한테 밥먹었나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한명없습니다 . 어머니 이거 저 10년치 김밥 다먹은걸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제게는 그 한줄에 2천원짜리 김밥이
지난 20여년간 쌓여있던 앙금을 풀어주는 김밥이었고
어머니 입에서나온 그 걱정의 한마디가 지금꺽 들어온 막말들을 녹여버린거같습니다
사람이란 힘든상황일때 받는 작은 호의가....
더 크고 무겁고 고맙게 느껴지는거같습니다
반대로 내가 여유있을때 받는 작은 호의는 당연히 여겨지는건 아닐까 라는 두려움도 생기구요
저는 아직도 수육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것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것이다 라는
나혼자만의 긍지 같은게 생긴거 같기도 합니다
딱히 티내고 자랑할 거리는 아닙니다
저는 항상 " 못된애" 였었고. 지금까지도 그 잘못에대한
사죄를 남들보다 좀더 비겁한 방식으로 풀고있을 뿐입니다
예전에 했던 말이지만
이러한 행위가 나에게는 면죄부를 받은것 처럼 기분이 좋았다
딱 이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정도 였습니다
현재 어머니는 이혼을 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냥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그럴만한 잘못들이 모여서 그렇게 된거라
" 아버지 편하신대로 하세요" 라고 하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 와...진짜 편한대로 하시네... 라는 생각을 한건 비밀입니다)
막 생각나는대로 쓰다보니 두서없이 뻘글이 깁니다
결론은....
김밥한줄에도 감사하자!!! 흠....흠흠!!
사람과 소통하면서 하나씯 배워갈뿐이죠
그말씀으로 위로가 되어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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