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 후 일본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조선 통신사를 주기적으로 보낸 걸로 아는데
통신사들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이 서서히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조정에 보고 같은 걸 했나요?
분명 두 눈으로 일본이 점점 발전하는 걸 봤을텐데
우리도 이제 발전해야 한다 개혁해야 한다 이런 상소문 같은 거 안 올렸나요?
임진왜란 전에도 많이 갔었죠.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물론 보고 했지만, 성리학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조선의 분위기상 그냥 묵살되었죠. 우이구곡,화양구곡 등 구곡이 많은 것도 주자가 말한 무이구곡을 따라한 겁니다. 이조시대 지배층들은 단지 성리학 덕후에 불과한 무리들이었죠. 일본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무역과 상업이 활성화되고 책도 다양하게 출간되는 등 조선보다 월등히 앞섰죠.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를 보내 달라는 집요한 요구에 당연히 응하지 않다가(삼국시대를 거쳐 내려왔던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고 사라지고 약탈해 갔으며 한양 점령 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불태워 버린 개XX들, 더군다나 자기 굽는 기술이 부족하여 도공들도 납치, 성리학 관련 서적과 학자들도 납치) 1607년부터 다시 보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일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존경의 대상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그뒤론 쭉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다 선교활동 안하는 네덜란드랑만 교역 중 1853년데 문제의 페리제독이 쳐들어 와서 불평등 조약을 맺고 그걸 배운 일본은 얼마뒤 조선으로 쳐들어와서 강화도 조약으로 써먹고....아 또 열받으니 여기까지
갔다 왔다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내야 될텐데 말입니다. ㅎㅎ
분명 두 눈으로 봤으면 일본이 점점 변화고 있다는 걸 알텐데
저녁점호 인원보고
현재원............
ㅈㅅ
메이지 유신 이후 강제 개항에 의해 급작스럽게 발전 하였습니다.
상업이나 무역업은 나름 발전 한 걸로 아는데
그 후 메이지유신 거쳐 급발달
분명 두 눈으로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을
당시 생생히 봤을텐데 이들이 보고를 했는지 안 했는지 궁금했네요
그뒤론 쭉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다 선교활동 안하는 네덜란드랑만 교역 중 1853년데 문제의 페리제독이 쳐들어 와서 불평등 조약을 맺고 그걸 배운 일본은 얼마뒤 조선으로 쳐들어와서 강화도 조약으로 써먹고....아 또 열받으니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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