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국가공인 친일파' 중 군인이 아닌 인물이 하나 있다.
연희전문학교 초대 총장=이자 문교부 장관, 초대 참의원 의장을 지낸 백낙준이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자리한 그의 묘에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전쟁을 앞뒤에 두고 나고 자라고 일하는 동안 민족을 붙들고 살리는 방도가 교육에 있음을 알고 일생 사업으로 교육에 종사하여 왔다."
▲ 국가공인 친일파 백낙준 |
ⓒ 한국학중앙연구소 |
백낙준은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자이자 언론인,
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설교, 사설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특히 <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과 이사로 활동하며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개소리 시전=/"우리 제국의 궐기는 대동아 공존공영과 세계평화를 위한 정의의 옹호다.
이러한 성전에 몸과 정성을 받들 수 있는 것은 황국에 생을 향유하고 있는 우리 신민된 자에게 무한한 영광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자기 나라가 이 세상 나라였다면 그 신하가 싸울 것이라 했다."
///백낙준이 직접 편집과 설교, 사설을 써가며 자신의 친일 행각을 알린
<기독교신문>은 194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조선기독교협회에 의해 창간됐다. 4월 29일은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로, <기독교신문> 창간 1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의거를 한 날이기도 하다.
'미영타도' 좌담회에 참석하고 전쟁협력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반복적으로 발표하는 등 사회단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적극 협력했다."
▲ 1943년 1월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 항공기 관련 기사 |
ⓒ 공훈전자사료관 |
해방 후 한 달 뒤인 1945년 9월 백낙준은 큰 어려움 없이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돼 김성수, 김활란 등과 함께 활동한다.
이어 10월부터는 경성대학(서울대학 전신)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부터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한다. 1946년 8월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됐다
.
1950년 5월부터 문교부 장관을 맡아 1952년 10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국민사상지도원 원장과 연희대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1953년에 다시 연희대학교 총장으로 복귀, 1957년 1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가 통합해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총장으로 취임했다. 1985년 1월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을 지냈다.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가 열리자
= 박정희 정권은 백낙준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
.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 이병도,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 출신 홍종인 등도 백낙준과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으로 박정희 정권 때 활동했다.
24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친일행적
~~~~너무나도 많은 극친일 행적이 있으나 방대 하여서 중점적인 자료만 옮겨 왔음.
~~~~그리고///***어느 학생의 소리///학교 다니면서 역대 총장중 여러명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었지.
동주형도 부끄럽게 한 친일파 총장들. 이대와 고대도 그렇고.
독림 민주..유공자면 자랑스럽게 말할수 있는데 말 못하는자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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