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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 없이 피아노를 배운 한 소녀의 이야기 ---
2001년경. 전라남도 여수.
6살짜리 여자아이가 종이 위에 건반을 그려 놓고
콧노래를 불러가며 피아노를 치듯, 종이를 두드리고 있다.
소녀의 부모는 지체부자유자로서, 어려운 환경에 피아노를 사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이가 난생 처음 보는 커다란 악기에 푹 빠져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은 밥을 굶을지라도 딸을 피아노 학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아이는 학원에서 몇 시간을 피아노를 정신없이 치고는 집에 와선,
피아노가 없으니 종이에 건반을 그려놓고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노에 대한 작은 소녀의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갔다.
지금 26살이 된 그때의 소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냥 좋았다. 꼭 피아노라기보다, 음악을 선택했다는 게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게 내게 행운이었던 것같다."
그녀는 그토록 어려웠던 환경에 대해 어떤 원망의 소리도 내지 않는다.
소녀는 피아노 콩쿨을 나갈 때마다 우승을 휩쓸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는 선화음악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
서울의 명문 예술중학교인 선화예중에 우선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충당할 수 없어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웃으며 괜챦다 말했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일반중학교에 진학한 뒤,
소녀는 낮에는 학교 공부를 하고 밤에는 학원과 교회를 돌아다니며 피아노를 쳤다.
코피까지 쏟아가며 공부와 피아노를 열심히 하였었던 어느날.
2009년 4월.
이렇게 "피아노 없이 피아노를 친 소녀"는,
폴란드에서 열린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 공동 우승을 한다.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몇 달 후엔,
복지단체와 음악협회에서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예술 교육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마련한 콩쿠르에서 당당히 대상을 차지.
국내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음악을 배울 기회가 주어진다..
(소녀는 그 전 해에도 여기에 지원했지만 그땐 선발되지 못했다고 한다.
예술계 특유의 텃세 때문은 아니었을까?)
흔히 예술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밀어주는 재력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들 한다.
예중, 예고를 거쳐 대학에서 전공을 시키고 해외 유학까지 시키고 독주회까지.
그 과정은 장난이 아니다.
즉 물질적인 배경이 있어야만 갈 수 있던 귀족적 경로였던 셈이다.
그런데 예중 예고는 커녕,
집에 피아노조차 없고, 중, 고등학교 과정 6년을 홈스쿨링으로 대신하고
혼자서 어렵게 피아노를 연습하던 소녀가
전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콩쿨에서 우승해 버린 것이다.
16세에 서울에 올라와 비로소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 소녀는
2012년 3월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입학하고,
곧바로 17세의 나이로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니스트 콩쿠르까지 우승해 버린다.
그러나
"피아노 없이 피아노를 배운 소녀"의 '반란'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2014년.
19세의 나이로 미켈란젤리, 마르타 아르헤리치, 프리드리히 굴다 등을
배출한 권위있는 스위스의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을 해 버린다.
그리고 2015년,
20세가 된 그녀는 세계 최고 피아노 콩쿠르 중 하나인,
제60회 부조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이자 유일무이 한 우승자가 되었다.
그 긴 역사의 59회 경연 중
단 27명만이 1위를 차지한....
이제, 그녀의 이름은
예술사에 새겨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년 당시.
부조니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당시 소녀는, 이미 부조니에서 우승을 해버렸기 때문에
쇼팽 콩쿠르 예선을 통과한 상태에서 본선 연주를 포기하였다.
만약 본선까지 그대로 갔었더라면.
조성진과 좋은 라이벌로서 우승을 다투었을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성진'이란 이름을 모두가 잘 기억한다.
그의 연주는 놀랍다.
흠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세련되고 귀족적인 연주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세대가
선사받은 또 한 명의 천재 연주자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6살때부터 피아노가 없어
종이에 건반을 그려서 흥얼거리며 피아노 연습을 하던 소녀의 연주를 보며,
그의 마음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를 궁금해하곤 한다.
확실한 것은,
그녀의 연주는 아르헤리치와 같이 격정적이거나
조성진처럼 세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소녀의 마음 속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들의 가장 정통적인 감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이라고도 말할 수 있쟎을까.
억눌리고, 또 억눌러서 마음에 피멍이 들 정도로 상처가 남아 있지만,
결코 옷섶을 풀러 보여주지도 않고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것.
결코 소리내고 울부짖지도 않으면서,
단지 겸허하고도 담담한 몇 마디의 말로 우리네 삶 전체를 표현해주는 듯한.
이 약관의 천재 음악가가 언젠가, 자신만의 예술 혼으로
우리의 이런 공통적 정서를 표현해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번 주말,
예술의 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을 들려준
그 옛적 소녀의 이름은 문지영이다.
그녀의 연주를 이렇게 들을 수 있어 영광이었다.
막말로 눈에 보이는 어려운 가정 다 돕기도 힘든데 능력 발굴에 엄청난 예산 썼다 나중에 그 아이가 아무것도 결과를 못낸다면요??
이렇게 길게 예산 써야 하는거 아무도 안할껄요.
백번 지당한 말씀이외다
일베벌레들은 이런거 들어도 모름 ㅋㅋㅋㅋㅋ
힘찬 격려의 박수를보냅니다.
흥하시길...
카리스마 멋지네요
우리나라 정말 뛰어난 사람이 많군요.
문지영씨 정말 멋집니다.
앞으론 쭈욱 꽃길만 걸어요 ^-^
선댓글 후 감상..
이런 환경에서 자란 피아니스트의
연주 느낌은 무엇일까..싶습니다
그러나..게시글 내용과 연주가 너무 딱 맞아떨어집니다.
윤미향이 딸도 피아노 외국 유학 전액 장학금 한거 아닌가요? 근데 그 흔한 콩클 우승은 있었나?
열정만 있으면 되는 음악인가보네요.
재능이 있어야 됩니다.
재능 더하기 열정
근데 이거 사람이 아닌거 같은데 사람인척 하네
복잡한 머리속을 잠시나마 비우고 아름다운 들판과 꽃밭에서 잠시 머물다온 기분이네요.
불평할 시간에 더 노력하신 거.
작성자님 감사합니다
피아노는 남자 손 크기에 맞게 만들어져 세계적인 유명 피아니스트는 모두 남자다.
남자보다 손이 작은 여성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이름에 올릴 수 없다.
여성은 아무리 잘해봐야 2등이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가 남성 위주로 만들어졌으며
일부러 여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악기는 남성권력에 의한 여성혐오다.
대충 이런 글이었다.
나이들수록 이런 클래식이 좋아지던데..
귀호강 감사합니다~^^
재력은 열정을 이길수가 없다는 걸 알려주신분이시네요
간만에 라흐
문지영님 기억해둬야겠네요.
자기 좋아하는거 하나로 끝까지 이겨낸 결과
우린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쉽게 부르고 싶지만
그속에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이 담겨있음을 본인만이 잘 알겁니다.
글을 읽으면서 이미 한편의 영화를 본듯한 한데요.
왜 몰랐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 입니다~ 유명해지셔야 하는 분 아닌가요?
이런거 보면 대한민국은 아직은 썩었어.
7살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넉넉치 못해서 처음에는 자기 집에 피아노를 마련하지 못했고, 교회나 음악학원의 피아노를 빌려서 하루 8시간씩 연습을 해야만 했다. 이때 생긴 별명이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다행히 2009년 현대차 아트드림 콩쿠르에서 피아노 중학생부 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고, 금호문화재단에서 음악 영재로 선발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김대진[1] 교수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고, 2010년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 입학했다.[2] 2013년에는 대원문화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되었고, 2014년에는 한예종 음악원 예술전문사 과정에 입학했다.
국내외의 여러 대회에 출전, 입상하다가 2014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콩쿠르와 2015년의 부조니 국제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3] 특히 부조니 콩쿠르에서는 15년만에 처음 나온 우승자였고,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 우승자로 기록되었다.[4]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외르크 데무스로부터 "이 시대에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음악성의 자연스러움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국내외에서 유수의 관현악단과 협연을 갖고 있다. 2017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1번으로 데뷔 후 첫번째 앨범을 발매했다. 2019년 10월에는 영국 런던의 유서깊은 연주회장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 연주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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