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사 공부의 마무리는 늘 눈을 감고 내 부모님과, 내 부모님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들이 그 세파 속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나의 할아버지는 1918년생, 광복을 맞이하던 해에 우리 나이로 28세셨다. 할아버지의 광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잘 상상이 되질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역사 변곡점 중 가장 아픈 부분이 바로 ‘맥아더 포고령’이다. 1945년 9월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한반도의 남쪽에서 군정을 시작한 미국은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서 “하던 일을 그대로의 위치에서 계속 하라”, 라고 발표한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 순사였던 사람들이 미군정 체제에서 계속 ‘경찰질’을 할 수 있게 된 거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땠을까. 일본 순사였던 사람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도 않고 그대로 경찰 노릇을 하는 모습을 보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미 군정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적개심을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단지 ‘행정상의 편의성’, ‘비용의 최소화’, ‘혼란 방지’ 같은 게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하던 일을 하던 위치에서 그대로 하라니, 친일파의 후손들이 독립군의 후손들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는 사실을 근거(?)까지 내밀면서 무슨 자랑처럼 지껄이는 극우 인사가 활개를 치는 세상이지만 친일파의 후손들이 독립군의 후손들보다 좋은 여건의 삶을 살았던 건 자명한 사실인 것 같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살던 1930년생 친일파 후손 A와 빼앗길 것 다 빼앗기고 더 빼앗길 것도 없는 상태의 1930년생 독립군 후손 B는 완전히 다른 경제적 토대와 사회적 지위에서 광복을 맞았다. 살던 그대로 살라고, ‘맥아더 포고령’의 미 군정이 상이하게 완전히 다른 두 삶에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질 않았다.
국내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이승만은 친일파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반공’이라는 명분은 자신들의 ‘친일 이력’을 숨길 수 있는 좋은 가림막이자 현수막이었다. 순식간에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모든 모순들의 뿌리에 저 ‘맥아더 포고령’이 있다.
내 할아버지가 살던 ‘대평리’라는 충남의 작은 마을에도 강 씨 성을 지닌, 악질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자는 동네 사람들이 무서워 몇 달인가 산속으로 도망갔다가는 다시 대평리로 돌아와서 빨갱이 잡는 경찰이 되었다고 한다. 아, 그때 나의 할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 내가 그때 살고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정치 깡패들을 동원한 이승만의 술책으로 반민특위는 제대로 활동도 하지 못하고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고 그 아픔은 역사의 흉터가 되었다. 지금의 '검찰 전체주의'가 그 맥아더 포고령이고 그 반민특위라고 나의 후대의 후대들이 자꾸 감은 눈 속으로 쳐들어와 실핏줄을 물어 뜯고 있는 것이다.
막 독립해서 배고프고 부패하고 혼란한시기에 검찰이 공정햇을리가
공정하지못한 쓰레기권력집단 명맥유지중 ㅋㅋㅋㅋㅋ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