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에 채소를 먹기 위해 독에 넣고 땅 속에 묻어 저장하던 풍습에서 유래되었으며 초기 형태는 삼국시대 때부터 먹던 하얀 백김치였고, 오늘날에는 흔하지만 당시에는 귀했던 재료들도 존재했기에 민가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넣지는 못하고 대체로 소금에 절여 먹는 정도였다.
고문헌에서는 주로 절인 채소라는 뜻의 '침채(沈菜)'에서 어원을 찾는다. 고려시대에 물김치, 나박김치, 동치미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고 고려양의 영향으로 원나라에서도 알려져서 《거가필용》 등의 책에 소개되기도 했다.
붉은 김치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래한 고추가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진 이후부터이다. 17세기 초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추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근이 닥쳤을 때 산천초목이 죄다 말라버려 소금을 만들기 위한 재료의 하나인 땔감의 가격이 치솟았다. 산과 들의 나무는 소금 뿐 아니라 민초들의 겨울나기를 위한 장작과 그 외 다른 부수적인 작업에도 사용되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소금값도 함께 폭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소금값을 아끼고자 다양한 방법의 대용품을 찾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춧가루였다.
소금값 폭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당시 기근에 허덕이던 상황과 맞물려 무엇이든 먹고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소금 이외에도 다른 재료를 배합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전라남도의 젓갈류이다.
이것은 꽤 획기적인 방법으로 소금만으로 김치를 담그면 쓴 맛이 났던 것에 비해,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아미노산 덕에 훨씬 진한 감칠맛을 갖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젓갈이 아닌 간장이나 된장의 부산물 등을 첨가해 김치 나물 속에 콩이 보이는 김치에 감칠맛을 추가하는 형식의 김치도 만들어졌다.
젓갈을 사용한 김치가 이전에 비해 영양분이 더 많아졌다는 점에서는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젓갈의 비릿함이 문제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비릿함을 없애기 위해 산초나 초피 등의 매운 맛을 지닌 재료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생력이 월등하여 산천초목에서 널리 자라는 고추를 이용해 젓갈의 비릿함을 잡는 방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고춧가루 이외에 다른 재료를 넣어 먹던 풍습은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추어탕을 먹을 때 산초가루를 넣어 맛을 내거나 목포 근교와 섬 지역에서 여전히 김치에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산초를 넣어 특유의 향을 즐기는 것이 그 예.
무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겼던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배추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김장할 때 흔히 사용하는 통배추의 경우는 고추보다도 유입이 늦다. 조선 후기 중국을 통해 들어왔는데 우장춘 박사의 품종개량 덕분에 중국산 종자를 사용해야 했던 배추도 한국식으로 개량하여 중국산 배추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통배추로 만들었다.
겨울철에 채소를 먹기 위해 독에 넣고 땅 속에 묻어 저장하던 풍습에서 유래되었으며 초기 형태는 삼국시대 때부터 먹던 하얀 백김치였고, 오늘날에는 흔하지만 당시에는 귀했던 재료들도 존재했기에 민가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넣지는 못하고 대체로 소금에 절여 먹는 정도였다.
고문헌에서는 주로 절인 채소라는 뜻의 '침채(沈菜)'에서 어원을 찾는다. 고려시대에 물김치, 나박김치, 동치미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고 고려양의 영향으로 원나라에서도 알려져서 《거가필용》 등의 책에 소개되기도 했다.
붉은 김치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래한 고추가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진 이후부터이다. 17세기 초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추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근이 닥쳤을 때 산천초목이 죄다 말라버려 소금을 만들기 위한 재료의 하나인 땔감의 가격이 치솟았다. 산과 들의 나무는 소금 뿐 아니라 민초들의 겨울나기를 위한 장작과 그 외 다른 부수적인 작업에도 사용되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소금값도 함께 폭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소금값을 아끼고자 다양한 방법의 대용품을 찾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춧가루였다.
소금값 폭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당시 기근에 허덕이던 상황과 맞물려 무엇이든 먹고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소금 이외에도 다른 재료를 배합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전라남도의 젓갈류이다.
이것은 꽤 획기적인 방법으로 소금만으로 김치를 담그면 쓴 맛이 났던 것에 비해,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아미노산 덕에 훨씬 진한 감칠맛을 갖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젓갈이 아닌 간장이나 된장의 부산물 등을 첨가해 김치 나물 속에 콩이 보이는 김치에 감칠맛을 추가하는 형식의 김치도 만들어졌다.
젓갈을 사용한 김치가 이전에 비해 영양분이 더 많아졌다는 점에서는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젓갈의 비릿함이 문제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비릿함을 없애기 위해 산초나 초피 등의 매운 맛을 지닌 재료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생력이 월등하여 산천초목에서 널리 자라는 고추를 이용해 젓갈의 비릿함을 잡는 방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고춧가루 이외에 다른 재료를 넣어 먹던 풍습은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추어탕을 먹을 때 산초가루를 넣어 맛을 내거나 목포 근교와 섬 지역에서 여전히 김치에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산초를 넣어 특유의 향을 즐기는 것이 그 예.
무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겼던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배추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김장할 때 흔히 사용하는 통배추의 경우는 고추보다도 유입이 늦다. 조선 후기 중국을 통해 들어왔는데 우장춘 박사의 품종개량 덕분에 중국산 종자를 사용해야 했던 배추도 한국식으로 개량하여 중국산 배추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통배추로 만들었다.
고문헌에서는 주로 절인 채소라는 뜻의 '침채(沈菜)'에서 어원을 찾는다. 고려시대에 물김치, 나박김치, 동치미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고 고려양의 영향으로 원나라에서도 알려져서 《거가필용》 등의 책에 소개되기도 했다.
붉은 김치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래한 고추가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진 이후부터이다. 17세기 초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추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근이 닥쳤을 때 산천초목이 죄다 말라버려 소금을 만들기 위한 재료의 하나인 땔감의 가격이 치솟았다. 산과 들의 나무는 소금 뿐 아니라 민초들의 겨울나기를 위한 장작과 그 외 다른 부수적인 작업에도 사용되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소금값도 함께 폭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소금값을 아끼고자 다양한 방법의 대용품을 찾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춧가루였다.
소금값 폭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당시 기근에 허덕이던 상황과 맞물려 무엇이든 먹고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소금 이외에도 다른 재료를 배합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전라남도의 젓갈류이다.
이것은 꽤 획기적인 방법으로 소금만으로 김치를 담그면 쓴 맛이 났던 것에 비해,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아미노산 덕에 훨씬 진한 감칠맛을 갖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젓갈이 아닌 간장이나 된장의 부산물 등을 첨가해 김치 나물 속에 콩이 보이는 김치에 감칠맛을 추가하는 형식의 김치도 만들어졌다.
젓갈을 사용한 김치가 이전에 비해 영양분이 더 많아졌다는 점에서는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젓갈의 비릿함이 문제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비릿함을 없애기 위해 산초나 초피 등의 매운 맛을 지닌 재료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생력이 월등하여 산천초목에서 널리 자라는 고추를 이용해 젓갈의 비릿함을 잡는 방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고춧가루 이외에 다른 재료를 넣어 먹던 풍습은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추어탕을 먹을 때 산초가루를 넣어 맛을 내거나 목포 근교와 섬 지역에서 여전히 김치에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산초를 넣어 특유의 향을 즐기는 것이 그 예.
무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겼던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배추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김장할 때 흔히 사용하는 통배추의 경우는 고추보다도 유입이 늦다. 조선 후기 중국을 통해 들어왔는데 우장춘 박사의 품종개량 덕분에 중국산 종자를 사용해야 했던 배추도 한국식으로 개량하여 중국산 배추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통배추로 만들었다.
군기아님 김치타령~
아마 곧 병원조식에 빽김치 나올겁니다. 많이드슈
고문헌에서는 주로 절인 채소라는 뜻의 '침채(沈菜)'에서 어원을 찾는다. 고려시대에 물김치, 나박김치, 동치미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고 고려양의 영향으로 원나라에서도 알려져서 《거가필용》 등의 책에 소개되기도 했다.
붉은 김치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때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래한 고추가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동아시아에 전해진 이후부터이다. 17세기 초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추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근이 닥쳤을 때 산천초목이 죄다 말라버려 소금을 만들기 위한 재료의 하나인 땔감의 가격이 치솟았다. 산과 들의 나무는 소금 뿐 아니라 민초들의 겨울나기를 위한 장작과 그 외 다른 부수적인 작업에도 사용되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소금값도 함께 폭등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소금값을 아끼고자 다양한 방법의 대용품을 찾아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춧가루였다.
소금값 폭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당시 기근에 허덕이던 상황과 맞물려 무엇이든 먹고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소금 이외에도 다른 재료를 배합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전라남도의 젓갈류이다.
이것은 꽤 획기적인 방법으로 소금만으로 김치를 담그면 쓴 맛이 났던 것에 비해,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아미노산 덕에 훨씬 진한 감칠맛을 갖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젓갈이 아닌 간장이나 된장의 부산물 등을 첨가해 김치 나물 속에 콩이 보이는 김치에 감칠맛을 추가하는 형식의 김치도 만들어졌다.
젓갈을 사용한 김치가 이전에 비해 영양분이 더 많아졌다는 점에서는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젓갈의 비릿함이 문제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비릿함을 없애기 위해 산초나 초피 등의 매운 맛을 지닌 재료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생력이 월등하여 산천초목에서 널리 자라는 고추를 이용해 젓갈의 비릿함을 잡는 방법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고춧가루 이외에 다른 재료를 넣어 먹던 풍습은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추어탕을 먹을 때 산초가루를 넣어 맛을 내거나 목포 근교와 섬 지역에서 여전히 김치에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산초를 넣어 특유의 향을 즐기는 것이 그 예.
무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겼던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배추김치를 대표격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김장할 때 흔히 사용하는 통배추의 경우는 고추보다도 유입이 늦다. 조선 후기 중국을 통해 들어왔는데 우장춘 박사의 품종개량 덕분에 중국산 종자를 사용해야 했던 배추도 한국식으로 개량하여 중국산 배추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통배추로 만들었다.
배추나 무, 오이 따위를 소금에 절여서 고춧가루, 파, 마늘, 생강, 젓갈 따위의 양념을 넣고 버무려서 담가 놓고 먹는 우리나라 고유의 반찬
딤채 짐채 였다함
고추는 임진왜란때 들어옴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