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뼈 속 깊이 새겨놓은 그리운 추억 한 두 개쯤은 가슴 깊숙이 묻어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예외만은 아니다.
봄이 오면 씨 뿌리고 결실의 계절을 접할 때마다 쓰라린 상처뿐인 가시밭길의 월남전과
어머님의 고귀한 사랑이 되살아난다.
월남전. 빛 바랜 그날의 포성도 귓가에서 멎었고 어머님이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떠나실 때 가슴 아팠던 그날의 추억을 몽땅 가져가실 것이지'
하는 때늦은 후회 속에 이제나저제나 애간장만 태우며 오늘을 살고 있다.
아버님은 첫돌이 지난 남동생과 세 살 된 나를 남겨놓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산이라고는 자투리 밭 천 평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우리집에는 아니, 장남으로 태어난
나에겐 소중한 재산이요 고귀하고 유일한 젖줄이었다.
가난만이 휘몰아 친 60년 그 때, 동이 트기도 전에 고픈 배를 꽁꽁 동여매고 은하수가 흐르는 시간까지 어머님과 같이 비지땀을 흘리며 두더지처럼 파고 뒤졌다.
그러나 언제나 배고픔의 연속이었고 불청객 같이 연년이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참기에는 눈물겨웠다. 말 그대로 삶의 애환과 비참함뿐이었다.
가난 때문에 배고픔에서 해방(?)되고픈 생각에서 실오리 같은 꿈을 안고 자원입대 했는지
모르겠고, 입대 전 나는 굳은 각오를 가슴 속 깊이 묻었다.
사회나 군생활에서 남처럼 살아남기 위해서는 참을 '인' 자와 정직성, 부여된 임무엔 소중한
목숨도 서슴없이 버린다는 나만의 노하우 그것이었다.
매사가 할 탓이고 마음먹기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것 같다.
사회와 엄격히 단절된 군생활에서도 나는 선임자와 동료들 사이에 신임을 얻어 하루가 다르게 흥미있게 느껴졌고 때론 장기복무 신청을 하고픈 마음의 충동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시도때도 없이 떠오르는 어머님과 남동생. 지금쯤 무엇으로 어떻게….
어머님과 동생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괴로움 속으로 몰아 넣었고 그때마다 뾰족한 방법도 없이 입버릇처럼 제대, 제대를 수차례 부르짖었다.
혹독한 꽃샘추위가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봄은 오듯이 막상 제대 2, 3개월을 눈 앞에 두고
보니 평소 찬란하게 느껴진 그 푸른 꿈도, 희망도 일순간에 지고 괴로움으로 변하여 썰물같이 밀려온다.
적막한 서부전선, 아니, 긴장감만이 유유히 흐르는 철책선.
하늘 머얼리 떠 있는 달님에게 소원을 빌었다.
'이 자식의 앞날에 행운을 점지해 주실 것을'
'지성이면 감천이다' 했던가.
어느 날 부대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고 회오리바람 같이 일어났다.
'비둘기부대니 맹호부대가 월남간다. 그 인원은 차출된다'는 등의 생소한 소문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자세한 내용도 대략 알게 되었다.
미지의 이국땅을 보고픈 일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나에겐 오직 배고픔 해결이었고,
배고픔엔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았다.
전투수당, 더 나아가 적탄에 맞아 이름모를 골짜기에 아니, 재로 변하여 허공에 날아가는 불운의 객(?)이 되어도 어머님 생전, 잡곡밥이라도 굶지 않게 해 자식으로 효도 한번 하고픈 충동이 일어나 파병지원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우나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어느 날 중대장님에게 파월 할 의사를 밝혔다.
"얼빠진 자식, 서로 안가려고 해 골치를 썩이고 있는데 넌 2개월 후면 제대인데 어머님
모실 생각은 않고 뚱딴지 같은 소릴…."
그러나 한 번 먹은 파월의 깊이 파인 꿈은 날이 갈수록 그 골이 깊어만 갔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졸랐다.
"넌 죽어도 날 원망하지 않겠지. 이번에 보낸다."
승낙을 얻었다.
'산 넘어 산이다' 란 말이 있듯이 화천 오음리에 가서 교육을 받는데 얼마나 고달픈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낙오병도 발생되어 원위치 된다는 소문을 들으니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나에겐 더 이상의 훈련을 치룬다 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죽지 않으면 까무라치겠지' 그것이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준령 넘고 계곡따라 먼지를 뒤집어쓰고 찾아온 곳 교육대였다.
'고추장도 맵다지만 시집살이보다 더 맵겠나' 그런 말이 있듯이 훈련소교육은 말 그대로
'개밥에 도토리였다.'
"총원 108명 학과준비 끝"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어쩜, 80년 창설된 일명 삼청교육대를 연상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눈만 보아도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 지혜와 순정까지도 알 수 있다' 한다.
독수리같이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매서운 눈초리, 심술보다도 금방 터질 것 같은 험상궂은
인상에 계급장 없는 작은 모를 눌러 쓴 폼이 삼청교육 조교와 빼닮은 교관이 다가온다.
엄격한 군장 검열, 소총, 개개인 위장술 등의 검열이 면밀히 치러진다.
"행군과 동시 진짜 사나이를 열창"을 시작으로 훈련장으로 이동한다.
훈련 중에 사사건건 완만한 동작이 엿보이면 가차없었다.
"이 새끼 동작 봐 원위치 복창" 목에 핏대를 곤두세우고
"그 꼴에 우째 베트콩을 잡을 수 있나 이 새끼야."
눈에서 불이라도 금방 튈 것 같은 불호령이 터진다.
강원도 산이 많기로 소문난 것은 삼척동자도 모를 리가 없건만 산도 아니요, 악산도 아닌
칼이란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가파른 비탈산에서 완전군장 된 상태에서
"베트콩 출현. 낮은 포복 높은 포복 좌로 12번 우로 14번 굴러"
구령에 어느 사이 군복이 찢어지고 살이 터지고 물에 빠진 생쥐같은 꼴에 피가 흘러 땀, 흙, 피가 범벅이 되어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오늘은 야간매복, 유격, 행군. 내일은 각개전투, 정찰, 크레모아지대 통과 등의 교육 때마다
항시 배고팠고 피곤함이 찾아온다.
장대비속에서 유격훈련을 치룰 때 눈, 코, 입 속살 깊숙이 팬티까지 비가 침투하지만 교관의
'동작그만' 구령은 간 곳이 없고 교육은 고무줄이었다.
밤, 낮 시도때도 없이 "베트콩 출현" 구령이 떨어진다.
그땐 진흙구덩이, 논, 밭, 똥간(화장실)을 불문하고 몸을 잽싸게 땅바닥에 밀착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교관의 눈에 낙오병으로 낙인되면 그땐 참을 수 없는 기합 세례를 전세(?)내야 되고 파월의
꿈도 아침 이슬처럼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모든 것을 체념하고 떠나는 나에게는 고통이요,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무섭게 긴장이 풀리고 '베트콩 출현, 동작불량, 화기 수업상태 지극히 불량,
300미터 선착순, 좌로, 우로, 앞으로 굴러' 갖가지 구령이 머리 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어느 날 가랑비가 내리던 날 저녁, 15리 떨어진 교장으로 매복훈련 떠났다.
고된 훈련으로 몸과 마음까지 피로가 겹겹이 쌓인 탓인가, 행군 중에 자세가 불량하게 교관의 눈에 띄었다.
"야 이 새끼야! 그 따위 동작으로 너 아니면 내 죽는 전쟁터에서 어떻게 살수가 있고 적을
초전박살 낼 수가 있겠나. 별명이 있을 때까지 '정신자세 지극히 불량' 복창과 동시 '오리
걸음' 실시"
날벼락이 떨어졌다.
반복되는 훈련 속에 내 몸을 내 힘으로 주체할 수도 더 이상 이겨낼 수 없었고 놀부같은 교관이 지긋지긋 느껴졌다.
인간인지 짐승인지 구분마저 안 되는 훈련 속에서 난 수십 톤의 물(?)을 오음리 땅바닥에 내리 쏟았다.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곳,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인간 도살장, 백정같은 교관이 원수로 가슴에 남았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듯, 몇 번인가 기절할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는 가운데 몸서리나는 교육을 마쳤다.
달리는 열차 속에서 '꼴두기' 같이 생각되는 교관을 떠올리며 냇물도 바다에서 만나듯
'그래 너 두고보자' 이빨을 갈며 치를 떨었다.
어디에서 달려왔을까?
군장병, 부모, 형제, 친척, 연인들이 3부두를 가득 메웠고 열렬한 환송식에 마음까지 들뜬다.
이래서 파월할 맛도 살맛도 나는지 모르겠다.
태극기 물결 속에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육군 군악대의 연주가 하늘 머얼리 울려 퍼졌고 해병 의장대의 시범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헤어지고 보내는 쓰라림과 아쉬움인가? 눈길 가는 곳곳마다 눈물바다를 이루었고 뜨거운 눈물만을 곱씹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그때였다.
남다르게 자식 사랑의 열정과 눈물이 많은 어머님이 달려왔다.
"세 살 때 애비 잃은 자식을 금쪽같이 키웠는데 못 간다 못 가 갈 테면 에밀
죽이고 가든지…"
목을 쓸어 안고 통곡한다.
"못 간다 못 가 널 보내고 난 어떻허구"
발을 구르며 흐느끼는 어머님을 두 명의 헌병이 달려와 진정시키더니 강제로 떼어놓았다.
그러나 어머님은 성난 기세(?)는 꺽이질 않았다.
"승선시작" 명령에 따블백을 짊어지고 대열에 섰으나 가진 것 없는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앞을 가려 사다리가 보이질 않았다.
뱃머리가 항 포구를 벗어날 때 뚫어지게 뒤돌아 보아도 그리운 어머님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이튿날, 육지라고는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 선상에서 어머님을 마음껏 불렀다.
'어디에 계시온지 그리운 어머님은 얼마나 보고픈지 달려가 보고픈 심정'을 목놓아 부르며
한없이 울었다.
5일 후 남극의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푸른 야자수 잎을 바라보니 희망도 꿈도 일순에 지고 긴장되었다.
'어떻게 하나' 두려움이 머리를 내리친다.
내가 배속된 곳은 맹호부대 3대대 9중대였다.
소총수에 야간, 주간정찰근무는 물론, 대, 소 작전에 참가하는 임무였다.
폭염과 비가 많은 나라, 천둥에 하늘이 몇 조각 나는 것 같았고 대서양같은 메콩강이 삽시간에 물바다가 되는 악천후 속에서 그 날도 매복을 마치고 탈진된 상태에서 맥없이 돌아왔다.
고향의 어머님이 편지를 보냈다.
"니 생명과 같은 무서운 돈을 찾아서 우체국에 맡겼다. 앞으로 니가 보내는 돈은 에미가
알뜰히 모아 우리도 남처럼 살자구나. 매사 조심하구."
왜 그런지 어머님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기분이 상쾌하고 보약이라도 한 첩 먹은 것 같이
힘이 오르고 자신감도 생긴다.
그 후 송금만은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매월 알뜰하게 보냈다.
어느 날 밤 11시 24분 경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비상이 걸렸다. 완벽한 군장으로 헬기에 탑승, 10부 능선에 진지를 구축했다.
"7부 능선에 월맹군 대대 병력이 있다." 분대장이 귀뜸해 주었다.
'사격개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 저곳에서 탕, 탕, 퉁, 쿵, 타타타, 각종 확이세 불을 토한다.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베트콩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오음리에서 배운 숙달된 솜씨로 좌, 우로 구르며 수류탄 투적, MI 소총을 번갈아 가며 치명타(?)를 보냈다.
몇 차례 적의 총알이 귓전을 스치며 '윙' 하며 지나간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훈련소부터 '너 아니면 나 죽지' 할 기막힌 우정의 이상우 상병이 적탄에
맞아 피를 토한다.
적개심에 눈알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씹따까리 같은 개새.끼들' 떨리는 육체를 진정시키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방아쇠에 힘을 주고 사정없이 갈겼다.
작전 3시간 후 총구가 벌겋게 달아 올랐고 더 이상 사격은커녕, 실탄이 동이 아니 마음끝까지 위축된다.
그 때였다. 분대장인 이종세 하사가 숨을 몰아 쉬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해야 살아 남는다. 실탄이 없으면 수류탄으로 응사하라. 그 후엔 육박
전으로 승부를 걸어라." 는 성급한 연락이었다.
그 후에도 한동안 사격은 계속 되었다.
얼마 후 '사격중지' 명령에 능선을 내려다보니 기갑부대 전차가 달려와 팔,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도주로를 찾는 베트콩을 종횡무진 누빈다. 피비린 내음이 코를 찌른다.
아슴한 기억이지만 1계급 특별진급과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나는 이종세 분대장과 한산대첩을 성공리에 이끈 충무공의 '임전무퇴' 교훈을 며칠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 후 70여회의 대, 소 작전과 매복, 정찰을 반복하던 어느 날 파월 13개월 그러니까 66년 8월 이상우를 잃은 울분에 쓰린 가슴을 억제하며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 자신도 모르게 '후' 하며 심호흡이 터져 나왔다.
문득 피를 흘렸고 수십 톤의 물(?)을 땅바닥에 쏟아 부은 지긋지긋한 교육장, 미운 짓만 악착같이 골라해 원수같이 생각되던 그 때 그 교관의 야속하고 얄밉던 감정이 변하여 생명의 은인처럼 생각되어 다정스럽고 그리움으로 피부 깊숙이 파고든다.
어디에 계시며 어떻게 무얼하며 살고 계실까 보고싶어진다.
두고 온 전우와 철딱서니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푼수짓만 고수한 가엾은 월남민.
특히 이상우 상병을 이억 만리땅에 버린 죄책감에 나의 눈의 초점은 퀴논 항구를 놓치지 않았다.
'국민이 분열되면 국력이 떨어지고 끝내 노예의 쓴 잔(?)을 마시게 되니'
기별을 들었는지 남동생이 골목길까지 달려왔다.
"어머님이 달포 전에 돌아가셨다."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니 형 목숨과 같은 무서운 돈으로 서당골 논 서마지기, 밭
이천 평 샀다."
"그 문서를 생전에 어머님이 금부치같이 간직했다."며 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튿날 아침.
동생의 손을 잡고 어머님 산소를 찾았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평소 그토록 좋아하시던 쌀, 좁쌀을 섞어 지은 밥을 어머님 앞에 올려놓고 불효의 용서를 빌고 그리운 어머님, 사랑스러우신
어머님을 목청껏 불렀다.
'어디에 계시온지 그리운 어머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