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 당, 심지어 명대까지 중국이 세계 최강, 최고의 선진국임을 잘 알고 있다. 화약이면 화약, 종이면 종이, 비단이면 비단, 의료면 의료, 선박이면 선박...유럽의 미개인들에 비교할 바 안되는 타의 추종을 허락치 않는 최선진국이었다. 명은 1368년 - 1644 (276년간) 존속한 나라인데(고려말, 조선초기~중기), 대충 지금의 중국영토가 확정지어지는 시기쯤된다. 남으로 해남도까지...이다. 다만, 티벳, 신장, 위구르, 내몽고, 동북방(만주, 연해주)은 그다지 필요성이 없어 그냥 나대지로 두었고, 오랭캐의 땅이라 불렀다. 그 부분까지 합하면 정확히 지금의 중국의 영토가 된다. 주원장이 세웠으므로 주씨왕조인데, 오늘은 3대 황제(명 성조= 영락제)시기에 환관(=내시) 정화와 그 원정함대 이야기를 해보자.
(위키) 영락제(永樂帝, 1360년 5월(쥐띠)~ 1424년 8월, 64세 사거)는 1402(42세 즉위)-1424년까지 22년간 통치하였는데, 그는 북경으로 천도하며,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다. 북쪽으로 후퇴한 원나라(몽고계)의 잔당 원정을 감행해 이들을 제압했다. 만주에는 여진족을 복속시키고, 남쪽은 베트남을 진조의 내란을 틈타 정복하였다. 거기에 해외의 동남아시아, 인도양까지 위신을 넓히기 위해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을 파견하여 일부는 메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한 대원정의 결과, 다수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을 맺었다.
(위키) 정화(1371년 ~ 1434년)는 마합지(馬哈只)의 아들(원래 마씨)로 운남성(윈난)의 무슬림(이슬람교도)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씨인 마씨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이라는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도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을 순례한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존칭인 할지에서 유래되었다. 선조는 징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원정때 몽골에 귀순하여 원(元)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때 윈난성 개발에 노력했던 색목인 정치가 사이이드 아쟈르였다. 정화가 이슬람교도 출신이었던 것은 나중에 영락제가 대원정을 준비할때 그 지휘관으로 정화를 맘에 두게한 이유중 한가지가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을 건국한 후 원나라의 세력하에 있던 윈난성을 공격하여, 아직 소년이었던 정화는 붙잡혀 거세를 당한뒤 환관이 되어 당시 연왕이었던 주체(朱?;후에 영락제)에게 헌상되었다. 주원장 사후 영락제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씨란 성을 하사받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위키끝)
명나라 영락제 4년(대략 조선초기), 정화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대함대 300척을 이끌고 1차 원정을 떠난다. 그 중 제일 큰 배는 길이 140미터, 폭 60미터라하니 어마어마한 것이다. 총 승무원 3만명 가량. 이는 바스코다가마나 콜럼부스에 비해 엄청난 규모였다. 함대 내에 의료, 취사, 휴식, 집무, 오락, 기록, 접대실은 물론, 심지어 콩나물 농사까지 지었다고 한다(비타민 C, 괴혈병 예방) 이러한 원정은 7차까지 계속되다가 나중에 중단된다. 대충보면, 호르무즈해협(페르시아만), 아덴항, 메카, 아프리카(수단? 이티오피아?)까지 원정하여 조공을 받았다.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등 진귀한 동물들도 조공을 받았다 한다. 실로 바스코다가마나 콜럼부스에 비해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며, 규모도 대규모이고, 또한 항해거리나 기간도 몇 십배에 달한다. 하지만 정화함대는 수탈이나 정복용이 아닌 명의 존재를 알리고 무역로를 개척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정화의 사후 명나라는 다시 쇄국정책으로 전환하여 이후 원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화제때 다시 대항해에 대한 목소리가 나왔으나 항해에 쓰이는 막대한 비용과 유교적 성격을 지닌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물거품이 되었다.
만일, 이러한 대규모, 첨단의 항해가 (빌어먹을 유교적 쇄국정책만 없었고) 계속 되었더라면, 아마도 세상은 중국중심의 아시아 우위적 지배논리가 승리했을지 모른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놔두고 중국은 바로 이 시점이 세계무대에서 뒤떨어지는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나는 본다).
명은 이후 쇄국정책을 하고 유교에 빠지며 쓰잘대기없는 명분으로 세월을 허송하다가 지난번에 보았던 누르하치의 후금에게 망하고 만주족(청)의 나라가 된다.
정화의 1차 원정 약 90년 뒤인 1492년 콜롬버스 원정대의 서인도 제도(남, 북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섬들)의 발견으로 유럽은 세계사의 중심으로 나선다. 이 때 우리나라는 한참 사화, 당쟁 중이던 성종-연산군 시절이다. 신대륙의 발견(지리상의 발견)은 당시로선 가장 중요한 향신료(이거 단순한 맛내는 용도 이외의 큰 의미*) 그리고 비단, 금, 노예, 도자기 등의 무역이 유럽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전에 중요했던 실크로드나 이태리 베니스(베네치아)나 지중해 무역, 흑해, 콘스탄티노플 등의 중요성은 줄어든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 직접 (희망봉 경유)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신대륙으로 항해해버리니깐 중간에 베니스 상인들이 중간폭리 취하며 장난칠 수가 없다. 그리고 실크로드는 급격히 쇠락한다.
세계는 급격히 포르투갈과 스페인 중심으로 재편되고 항해술을 기반으로 세계는 정복의 대상이되고 그에 따른 부의 축적과 무역으로 유럽의 문화는 급속히 발달한다. 명과 청은 찌질이가 되기 시작한다.
정화의 대원정대...나는 중국의 최고점이라 본다. 그 이전에는 중국이 세계최강이었다. 수, 당, 원, 명...모두 그렇다. 하지만 정화 사후 원정대가 파기됨으로써 90년 뒤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세계의 중심지가 이동된다. 중국의 애석하게도 마음과 눈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의 북한처럼. 중국은 급기야 영국에게 굴복하면서 억지로 문을 열게되나 이미 세상은 저만치 나가고 있었고 심지어 일본보다도 못한 국가가 되어있었다. 유교적 폐쇄주의가 정화를 굴복시킨 것은 중국최대의 비극이다.
중국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저쪽 아랍쪽 문서에도 나옴.
세계사적으로 인정된 내용임
냉장고가 없던 당시 육식하는 유럽인들은 일단 고기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부패하지 않으니까...그런데 그 삐쩍마른 고기를 씹으려니...당췌 맛이 없어 못 먹겠는 것
그래서, 고기를 삐쩍 말려 보관한 것을 나중에 배고플 때 먹을 경우 그나마 향신료라도 곁들여 먹으면 먹을만했다. 따라서 후추, 너트메그 등의 향신료는 유럽인들에게 절대 필수품이다. 비단처럼(결혼예복) 따라서 향신료와 비단은 중세무역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 비단, 향신료는 중국, 인도 등지에서 실크로드나 흑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하지만 희망봉 우회-인도가는 항해길. 그리고 서인도(미국)를 발견하면서 실크로드, 흑해, 콘스탄티노플은 필요성이 줄어들고 바로 각처로 무역하게 되니깐...유럽이 자체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양, 소, 칠면조까지 모두 미디엄이다.
다만, 칠레산 돼지고기는 웰던으로 먹는다.
좀 길게 슬라카믄 300자 넘었다카네
무식한거 티내시네 장난하슈?
중국이 300척에 3만명 집어처넣고 동아프리카까지 전투벌이면서 모든나라를
굴복시키면서 원정나간거는 세계인이 다아는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솔찍히 과거 중국 속국 맞습니다
판옥선이 대단한배? 어처구니가없습니다 그런배는 중국이나 일본도있습니다
중국은 수군을 없신여겨서 그렇고 일본은 임진왜란때 주로 빠른수송을위해
가벼운배들만으로 구성돼서 그렇지 판옥선이 주변국들에 비해 그렇게 뛰어난배가아닙니다 그리고 로마돌격선은 원양항해도 못하는 배인데 그건뭐하러 들먹이시는지;
제친구들도 향신료 친거보다 안친걸 더좋아하죠 저는 친게더맛잇지만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