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글은 아마.....남들이.......나의 정신연령으로....할수 없는 당근(펌)이구요...우리는 저런인간을 존경하지 않아야 하며 우리역사에 과오로 남을 인간을 우상화하지 말아야 합니다.박정희를 우상화하는 짓은 김일성을 우상화 하는 짓임을 알기를 바라며. 우리는 저런 인간보다 지금부터 펼처질 영웅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숨은 영웅 안무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1883.6.29~1924.9.7]
‘하늘에 사무친 유한은 구름빛을 시꺼멓게 물들이고 땅 위에 거꾸러진 충혼은 피꽃이 붉게 피었더라.’ (遺恨充天雲色黑 忠魂塗地血花紅) - 안무 장군 조시(弔詩) -
1883년 6월 29일 함경북도 경성군 행영면에서 출생하였다. 일명 병호, 호는 청전이다. 17세까지 고향에서 성장한 선생은 1899년 대한제국 진위대병사로 입대하여 하사관을 거쳐 서울 교련관 양성소를 졸업한 후 무산 등지에서 교련관으로 근무하였다. 교련관은 조선후기 각 군영 소속 군관직의 하나로써 주로 군대의 교련을 맡은 품외직으로 출신, 전함, 한량, 항오(兵卒)를 막론하고 사법, 병서강, 진법 등 3기로써 시험을 치러 선발하였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게 되자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당시 일군과 교전중 전사한 장교가 11명, 사병은 57명, 부상자가 일백여 명, 그리고 피체된 수는 막대하였다. 서울에서의 군대 해산과 시위대의 항전은 지방 진위대 병사들에게 알려지고 시위대에 대한 일군의 잔인한 학살 행위는 그들을 격분시켰으며 순식간에 시위대의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중에서도 의병을 모집하여 일군과 싸우는 의병전쟁으로 확대 되었던 것이다.
일제하에서 군에 몸담고 있다는 것은 양심상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선생은 즉시 군복을 벗어던지고 함북 경성의 함일학교와 무산의 보성학교의 체육교사로 지내면서 학생들에게 병영식 체조를 가르쳐 장차 독립군으로서 필요한 체력과 담력을 배양시켰다.
경술국치 후 만주에서 대한국민회 소속 국민회군을 조직하여 사령관에 취임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자 선생은 울분을 더 참을 수가 없어 구국항쟁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당시 북간도 명동촌에 정착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이동휘와 김약연 등을 만나 1919년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동회 소속부대인 국민회군 3백여명을 편성하여 무장시키는 한편,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전개 하였다.
▲ 3.13 반일의사릉 1919년 3월13일 용정에서 일어난 반일시위는 연변지구의 조선족인민군중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 정책에 저항해 민족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벌린 군중성혁명투쟁이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만주방면에는 여러개의 독립투쟁을 위한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북간도 지방과 훈춘에서 황병길, 박치환 등의 주도로 건국회가 조직되고 화룡현 태랍자에서 충렬대가 조직되었으며 연길현 국자가에서는 자위단과 조선국민의사회가 조직되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따라 연길, 왕청, 화룡 3개현의 독립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회의를 열고 간도 대한국민회로 통합, 발전시켰던 것이다.
구춘선 등과 함께 중국측과 긴밀히 협조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 대한국민회군 안무가 이끌던 대한국민회의 직할 독립군 부대 국민회군의 주둔지(延吉市 依蘭鎭 春興村).
그후 훈춘 대한인국민회의 모든 회원을 합쳐 80여개소의 지휘로 확대시켰으며 이들 지회를 통하여 거주동포들의 자치생활에 치중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과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 부대를 양성하였다.
그 중에도 국민회의 지도자 김영학, 김약연, 김내범, 구춘선, 마 진, 유찬희, 강백규, 신학봉, 정재면 등 인사들은 현지의 중국 관헌과 긴밀한 협조로 중국 관민들의 깊은 이해와 협조를 얻어 당시 중.일간에 분쟁이 되었던 무기 반입과 독립군 훈련 등을 순조롭게 추진할수 있었다.
이때 장군은 국민회의 국민군 300여 명의 훈련을 직접 담당하여 정예부대로 키워 나갔으며, 장정을 모집하여 2개 월간의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기는 니콜리스크에서 구입하는 한편, 사관양성을 위해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본격적인 무장역량 강화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전력면에서 가장 막강한 부대로 육성하였다.
명월구에 무관학교를 세워 사관양성과 전투력 배양에 힘쓰다
▲ 대한국민회 사무용품 인쇄기,금전등록기,압인,숫자인,금속판 주소록과 각종 고무인이 남아있다.
국민회군은 안무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국민회의 직속 군사조직으로서 대한국민회의 관할구역내의 북간도 지역을 순회, 주둔하면서 경찰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봉오동 전투가 개시되기 직전인 1920년 5월 28일에는 대한 독립군과 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군북로독군부
를 조직하고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켜 강력한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무렵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가 약 550명으로 총 1천 2백여명이었으며, 무기는 기관총 2문, 군총 약 900정, 권총 약 2백정, 폭탄(수류탄) 약 1백개 탄환 군총 1정당 150발 망원경 7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봉오동 전투에 대비하여 전력을 강화시키다
연합독립군의 편성은 사령관에 최진동, 연대장에 홍범도, 제1중대장 이천오
, 제2중대장에 강상모, 제3중대장에 강시범, 제4중대장에 조권식을 임명하여쓰며 이때 선생은 최진동 사령관의 부관에 임명되었다.1920년 4월 20일 연길현 화전사
에서 국민회와 군무도독부, 군정서의 중진 약 4백 명이 모여 군자금 모집, 장정의 소집 및 훈련, 무기증강 등 전략 강화책을 협의하였으며 각 부대의 전력증강과 독립전쟁 성공을 위한 사업이 착착 진행되었다.
따라서 두만강 건너 북쪽 국경지대인 연길, 화룡, 왕청, 훈춘일대에서는 독립군 부대의 활동이 점점 활발해졌으며 그 중에도 강건너 맞은편 봉오동, 걸만동
, 토문자, 나자구, 백초구 등지에는 독립군 여러단체가 주둔하여 군사훈련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두만강 대안지방에서는 독립군의 움직임이 활발함과 함께 국내 진입도 빈번하였다.
일본 정규군을 골짜기로 유인, 섬멸하여 독립군 최초의 승전을 거두다
▲ 봉오동 전투지역 입구.
강양동 초소를 습격당한 일군은 곧 남양수비대장 신미이랑에게 명하여 강을 건너 삼둔자를 공격하여 복수전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령관 최진동은 1개소대를 삼둔자 서남방에 미리 잠복시켜 일군을 기습 격멸하였다.
참패소식을 접한 나남주둔 19사단은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안천이랑 소좌의 지휘로 19사단의 보병대대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로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까지 진입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사령관인 홍범도는 진입해 오는 일군이 봉오골(현 봉오동)에 도달하기 전에 마을 주민들을 전부 산중으로 대피시켰다.
독립신문 제88호(1920. 12. 25)는 전투전 피아의 형세를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제1연대 병력을 봉오동 상촌(上村)부근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내렸다.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는 부하 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戰備)를 하였다가 적이 내도할 때에 그 전위(前衛)를 동구(洞口)에 통과케 한후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포위중에 입할제에 호령에 의하여 사격케 하고 연대 증원장교 이원(李園)은 본부급 잔여중대를 영솔하고 서북산간에 점위하여 병원증원(兵員增援)과 탄약보충, 양향급양(糧餉給養)에 임케하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1분대장 이화일로 그 부하 1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高麗嶺)북편 약 1천 2백 미터 되는 고지와 그 동북편 촌락 전단(前端)에 약간 병원(兵員)으 분(分)하여 잠복했다가 적이 내도 하거든 전진을 지체케 하다가 봉오동 방면으로 양패퇴각(佯敗退却)케하고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는 동북산서간 최고봉 독립수하(樹下)에 재하여 지휘케 하였다."
봉오동의 독립군 본영을 일거에 격멸하려던 일군의 추격대는 4시간에 걸쳐 격전 끝에 동남쪽의 비파동을 거쳐 유원진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적군(日軍)의 사자(死者) 1백 57명, 중상자 2백 여명, 경상자 1백 여명이오, 아군(독립군)의 사자(死者)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이며, 적의 유기물은 다유(多有)하나 아군의 치중예비태마(輜重豫備駄馬)가 무하고 또 전투를 목적한 계획전이 아니오 불우전(不虞戰)이 되므로 차(此)를 획취(獲取)키 위하여 력(力)을 비(費)할 여지가 무하므로 보병총 약간 정(挺)만 수취(收取)하다."
새로운 항전기지인 청산리로 이동, 일대 격전을 대비하다
독립군의 봉오동 전첩은 독립군과 일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먼저 일제측은 봉오동 전투의 패전을 겪고 독립군의 능력과 전력을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하여 그에 대한 철저한 토벌을 계획하여 소위 '간도지방불령 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한편 독립군측에서는 10년 이래 대승으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고 각 독립군단의 군사통합과 아울러 병력의 보강 및 군비확충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군의 투지와 전력에 당황한 일제는 수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독립군에 대한 소위 '토벌작전'을 감행하게 되는데, 이에 대비하여 안무의 국민회 2백 50여 명은 동년 8월 31일 의란구의 근거지를 떠나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여 9월 말 경에 이도구 지역에 이르러 진영을 재정비 하였다. 또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은 192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고자 각각 그들 본영을 떠나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 서북지방의 밀림지대로 진군했다.
일본 정규군 2만 여명과 10여 차례에 걸친 혈전끝에 청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을 거두다
이때 안무의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어랑촌 전투와 완루구 전투, 고동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승첩을 거두면서 독립전쟁의 뜻깊은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독립군의 값진 승전은 독립군 지도부의 뛰어난 전술과 용병술, 독립군 병사의 임전무퇴 정신과 동포들의 충심어린 식량지원 및 정보제공 등이 혼연일체되어 이루어낸 것이었다.
▲ 일본군이 훈춘의 한인 및 독립운동가를 학살했던 훈춘사건 관계사진으로 불에 타버린 건물, 가옥, 훈춘시가의 모습이다.
전쟁에 참패한 일본군은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명칭 아래 일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대병력을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한 다음, 출병의 적당한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10월 초에 중국 마적(두목 장강호
)을 매수하여 훈춘사변을 일으킨 후 제19연대는 무순, 흥경, 통화, 환인, 관전 등지로, 제20연대는 공주령, 산원포, 영액성, 개원 등지로 출병시켜 무고한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으니 이것이 곧 경신참변이다.
▲ 살해된 시체 일본군이 훈춘의 한인 및 독립운동가를 학살했던 훈춘사건 관계사진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희생자를 안장한 관의 모습이다.
지금이야 일본이랑 충돌할 이유가 전혀 없다지만.... 나중에 언제라도 우리가 먼저 일본으로 넘어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