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일휴가 》
이등병 때는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하루하루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다보니
어느덧 입대한지도 100일이 지나갔다.
위로휴가를 나가는 날짜가 나왔고,
군생활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양병장이 그랬다-_-
아니 이게 아니라;;
군생활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날짜를 받은 다음부터
하루하루 휴가날짜만 세며 기다리게 되었다.
어찌보면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이곳에선 참 많은 일이 있었고,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으며,
내가 이곳에 머무른 그 시간동안
바깥 세상은 참 많이도 변해있을것만 같았다.
휴가날짜가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을만큼이나 다가오자,
나를 포함한 5명의 이등병들은
매일같이 휴가계획을 세웠다가 수정하고
또 다른 계획을 잡았다가 수정하기를 반복하며
오로지 머리속엔 휴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버렸다.
원래 동기는 10명이지만
10명이 한꺼번에 휴가를 나가버리면
전투력에 엄청난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다섯 명씩 나눠서 나가게 되었다.
첫째날 - 우선 동기들과 간단하게 한잔하고 집에 가서 목욕후 가족들과 외식
둘째날 - 친구들과 만나 회포를 풀고 술한잔 먹고 겜방
셋째날 - 친구들과 바닷가 놀러감-_- 여자꼬심, 즐겁게 논다
넷째날 -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작별인사겸 술한잔 하고 집에 일찍와서 가족들과 시간보냄
마지막날 - 아침일찍 출발하여 동기들을 만나 부대근처에서 놀다가 복귀
우선 내가 머리속에 짜놓은 백일휴가계획은 위와 같았으나
막상 휴가를 나가면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군복무를 마친 아저씨-_-님들은 공감하실 것이다.
실제 나의 백일휴가 일정은
첫째날 - 동기들과 노는것까진 좋았으나 심하게 놀다보니 집에 새벽 2시에 도착
둘째날 - 친구들 다 군대가고 없음. 혼자 겜방에서 하루종일-_-
셋째날 - 친구들도 없고 바닷가는 넘 멀어서 못감. 시간 아까우니 걍 집에있음.
넷째날 - 마지막날이라고 엄마가 통닭 두마리 시켜줌. 배터지게 먹고 잠.
마지막날 - 존나 복귀하기 싫어서 밍기적대다 시간이 늦어 동기들도 못만나고 간신히 복귀
이상이었다-_-
원래 세상일이 맘먹은 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다 할수 있다면
애초에 난 군대도 안갔을거다 씨바-_-
어쨌거나 하루하루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고
점점 눈앞으로 휴가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갔다.
" 야 알랑이 너 휴가 언제 나가냐?"
" 예. 이틀 뒤에 나갑니다."
" 음... D-7이구나."
" 아니 저... D-2입니다.(수줍) "
" 뭐가 임마. 휴가복귀날짜가 D-7이라고 색갸! 이제 일주일 뒤면 휴가복귀구나 불쌍한 새끼 낄낄"
-_-
" 뭐? 백일휴가? 이제 그거 나가서 어쩌자는 거야? 그냥 자살햄마."
" 얌마 백일휴가 갔다오면 졸라 적응안된다. 차라리 안나가는게 나아."
" 카카캇. 이제 백일 지났으면 나머지 690일은 어떻게 살래? 캭캭"
-_-;
고참들은 휴가를 앞둔 우리들에게
휴가에 대한 기대보다는
항상 좌절감만을 불러일으켰다.
이새끼들 솔직히 부러우면서...-_-
머리 속에 휴가생각만 가득 차 있으니
지나온 날들만큼 시간은 좀처럼 가주질 않았으나
단지 나 혼자만의 생각일뿐
역시나 국방부 시계는 돌고 있었으니...
마침내 운명의 그날은 찾아오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이 밝았다.
내 지금껏 군생활하면서 이날만큼이나
불침번의 '기상하십시오!' 소리가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항상 그랬듯이 점호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와 더블백을 쌌다.
관물대를 비우고 세면을 마친 다음
한번도 입지 않은 A급 전투복과 전투화를 꺼냈다.
이제 전투복을 갈아입으려는데
반대편 침상을 쓰던 화기소대의 박상병이 불렀다.
" 으잉? 너 이 전투복..."
" 예. A급인데...무슨 일이신지..."
" 얌마 너 오늘 어디 가냐?"
휴가나가잖아 임마-_-;
" 아 저...오늘 백일휴가라서 말입니다..."
" 뭐? 백일휴가? 씨발 근데 옷이 이게 뭐냐? 그러고보니 전투화도?!!"
" 음...이거 한번도 안입은 A급 맞는데 말입니다.."
" 그게 아니라 니네 소대에서 전투복 줄 안잡아줬냐? 전투화 광도 안내주고?!!"
" 예...-_-?"
" 이런 미친 오일병 새끼! 맞후임 백일휴가 나가는데 전투복도 안다려주다니! 오일병!!"
다른 부대도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중대에선 백일휴가를 나가는 이등병이 있으면
일병~상병 급의 분대 맞고참이
전투복에 이쁘게-_- 줄을 잡아주고
전투화가 번쩍번쩍하도록 물광을 내주는 관습이 있었다.
" 오일병 얌마!! 니네 막내 휴가나가는데 넌 도대체 뭐한거야? 앙?!!"
" 아니 저...그게...랑이 너 휴가 나가냐?"
" 네...-_-; "
" 이새끼 이거 맞고참이라는게 막내 휴가날짜도 몰라?!!"
" 아니...우리 막내는 휴가 갔다왔는데...그래서 이놈도 갔다온줄 알고..."
우리 분대의 막내인 뺀질이가
부친상을 당한 관계로 나보다 먼저 휴가를 다녀왔기 때문에
오일병은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휴가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다른 동기들은 이미 준비를 마친 채
휴가출발신고를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에잇!! 할 수 없다! 내가 바지줄을 잡을테니 니가 상의를 잡아!"
" 예!"
" 아...저...괜찮습니다...그냥 나가면 됩니다..."
"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임마! 그냥 내보내면 다른 부대애들한테 욕먹어 새꺄! 좀만 기다려!"
이런 제길...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일초라도 빨리 여길 뜨고 싶단 말이다...-_-;
여기서 잠시 박상병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박상병은 60mm박격포반으로,
나보다는 11개월이나 고참이었다.
그러나 박격포반 인원들은 죄다 병장급 이상이어서
상병 3호봉까지 막내 생활을 했던
비운의 사나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쨌거나 나와는 많은 짬밥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 2년여의 군생활 중 동기들과 뺀질이 다음으로
나와는 가깝게 지낸 사람이다.
앞으로 자주 출연할 터이니 잘 익혀두도록 하자.
양병장의 전역으로 인해 새로 꺼내놓은 캐릭터다.
이놈도 양병장 못지않은 훌륭한 또라이였다. -_-
보통 전투복 줄을 잡는 데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평일에 다림질을 한다는건 생각도 못하고
주말에나 반나절 정도를 투자해서야
간신히 전투복 한벌의 줄을 잡을 수 있다.
그걸 이놈들은 고작 몇분만에 끝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_-
" 휴가자들 휴가출발신고하러 오랍니다!"
행정반에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박상병과 오일병의 손은 엄청나게 빨라졌다.
" 에이 씨 대충 해!! 일단 모양만 잡고 복귀하거든 다시 잡아줘!"
" 예 알겠습니다. 근데 전투화는..."
" 그냥 솔가져다가 문질러!! 시간없어!!"
이놈들 지꺼 아니라고...-_-;
어쨌거나 순식간에 휴가준비는 끝났다.
잽싸게 대충 줄잡힌 전투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으니
그나마 휴가나가는 사람의 복장으로는 보이긴 했다.
전투화도 솔로 대충 문지른거 치고는
제법 반질반질 광도 나긴 했다. -_-;
" 충! 성! 신고합니다! 이병 OOO 외 4명은......
......백일위로휴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 고! 합니다!"
휴가출발신고를 마치고...
군장과 더블백을 창고에 집어넣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비록 4박 5일간의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다시 떠나온 그곳으로 돌아간다.
부대를 나서는 발걸음은 참으로 가벼웠다.
나가면서 위병조장을 서고있던
고릴라 병장에게 간단하게 휴가 다녀오겠다고 신고를 했다.
" 그래. 잘 다녀오고...맛있는거 많이 먹고...재밌게 놀다와라."
" 예. 알겠습니다."
" 음...그리고..."
" 예."
" 꼭... 돌아와야된다."
" 자 잘못 들었습니다?;;"
" 꼭 돌아와야해 랑아..흑흑...너 탈영하면 나도 같이 영창이다 색갸. 제발 돌아와줘."
" ...예...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_-; "
" 오냐 그럼 잘 갔다오너라....응? 근데...너 전투복 줄 누가 잡아줬냐? "
" 아...오일병이..."
"...풉...;"
" 아니 왜 그러십니까?-_- "
" 등줄이 대각선으로 아주 예쁘게 잘 잡혔구나.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인가보다. 푸하핫"
오일병 이자식...
어째 아침에 서두를때부터 알아봤다...-_-;
지금 개구리마크가 달린 내 전투복에는
아직도 사선으로 잡힌 줄의 흔적이 남아있다.-_-
뭐 등줄이 대각선으로 잡혀있건
전투복에 구멍이 났건
이때만큼은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물론 짬밥을 조금 더 먹고 난 후에는
전투복의 줄 하나하나가
마치 목숨인양 느껴졌지만..
이때는 그저 휴가를 나간다는게...
부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위병소를 나선 후에...
산길을 한참 내려가니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나오고
여기저기 고층아파트도 보였다.
드디어...
세상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다섯 명의 동기들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다가...
자이병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것을 시작으로
전투복 상의를 꺼내입고 담배를 꺼내물었다. -_-
뭐 휴가나오면 다들 그렇다.
휴가나가서 제일 하고 싶은 건
다른게 아니라 바로 저런 군대에서 금지된 행동들이다.-_-
일단 우리는 전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등병 때이니만큼 부대에선 서로 얘기해볼 기회조차 거의 없었기에
동기라고는 해도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우리들은 정말 절친한 친구들처럼이나
버스 맨 뒷자리에서 즐겁게 얘기하고 떠들어댔다.
일단 전철역에서 내린 다음에
가까운 식당을 찾아 간단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동기 중의 한놈이 제안을 했다.
" 야 아까 버스타고 오다보니까 저기 앞에 영화관 있던데 우리 영화 한편 보고 가자."
" 아 그럴까? 그러고보니 영화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영화 한편 때리자."
" 그래그래. 이왕 나온거 졸라 재밌게 놀다 들어가자."
그러나 나와 자이병은 이 제안에 반대했다.
" 영화는 무슨...그냥 고기집에서 술이나 한잔 하고 흩어지자."
" 그래...시간도 없는데 영화를 본다는건 시간낭비지..."
물론,
나도 자이병도 영화를 보고 싶긴 했다.
그렇지만...
군바리 다섯이서 씨발; 영화를 보러 가자고?-_-;
결국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반대의견은 묵살당하고...
다섯마리-_-군바리는
전투복을 입은 채로...
평일 오전이라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은 영화관에서
한복판에 다섯 명이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다. -_-;
이때 본 영화가 라이터가 어쩌고 하는 영화였는데
너무 쪽팔려서 전투모 뒤집어쓰고 잠들어버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_-
우리는 그렇게 영화관람을 마치고
근처에 보이는 고기집을 찾아 술을 시켰다.
같은 날 입대해서 같은 곳에서 신병교육을 받고
같은 곳으로 자대배치를 받아 같이 생활하는
10명의 동기들...
그중 다섯 명만 이렇게 먼저 나와 즐기고 있음을 아쉬워하며
우리들은 술을 마셨다.
한동안 마시지 않아서인지
몇번 오가지 않은 술잔에 모두들 얼굴이 빨개져서 비틀거렸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모두들 기분좋게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을 한잔씩 걸치고 나와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1시를 지나고 있었고...
모두들 집이 경상도 지역인지라 집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리므로
조금더 서둘러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전철을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에 도착해 우선 기차시간을 알아보고는
잠시 술도 깰겸 바람을 쐴까 싶어 역 바깥으로 나오는데
문득 낯설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익숙한 네거리와 익숙한 횡단보도..
낯익은 핫도그파는 아저씨와
눈앞을 지나가는 낯익은 번호의 버스...
입대하기전 2년 동안...
몇번씩이나 왔다갔다하던 바로 그 역.
내가 다니던 학교가 있는 그 동네였다.
이곳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채 30분이 되지 않는 거리.
이미 동기녀석들과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한 터라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으면 상당히 늦어버릴 지도 모르지만
그냥 이대로 가야한다는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었다.
" 얘들아...저기..."
" 응? 뭐?"
" 저...난...좀 가볼데가 있어서...미안한데 니들 먼저 내려가라."
" 뭐? 얌마 지금 늦었어. 빨리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인사부터 드려야지."
" 으응...잠깐이면 돼. 잠깐만 어디 좀 들렀다 갈려고...미안...복귀하는날 전철역 앞에서 보자."
" 에이...할수 없지...그럼 먼저 간다. 휴가 잘보내고 와라."
" 그래...니들도 재밌게 보내고 와라."
동기들을 그렇게 보내고는
나는 곧바로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도 생각지 않고 있었지만
생각이 난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30분여를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반가운 교문과 눈앞에 펼쳐지는 넓은 캠퍼스...
휴학한지 반년만에 찾아오는 학교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다.
교문을 들어서서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마침 방학기간이라 그런지
학교 안은 한적했고
다행히 전투복을 입고 학교를 들어서는 쪽팔림은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_-;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동아리방 앞에 도착해
조심스레 노크를 해보았다.
......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문을 열어보니 불이 꺼져 캄캄한 동아리방과
어지럽게 널린 소주병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일까...
동아리방을 들어서자마자 소파 위에 그대로 털썩 누워버렸고
끝없는 잠에 빠져들어갔다.
.
.
.
.
.
얼마나 지났을까?
아픈 머리통을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6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휴가나온 군인이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일단 공중전화로 뛰어가 부대로 전화를 걸어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해버렸다.
방학이라 당연히 사람이 없을 터인데...
괜한 짓을 한건가?
방명록에 글이나 한줄 남기고
서둘러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어라? 내가 조금 전에 불을 켜놓고 나왔던가?
문을 열어보니 뜻밖에도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 어...어라? 지 진수냐?!!"
" 으잉? 뭐야? 너 랑이 아냐?!!"
" 와핫핫핫핫 진수 이자식!! 이게 얼마만이냐?!!"
나는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녀석에게 달려가다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 응? 벌써 나왔냐?-_- "
-_-
-_-;
벌써라니 십색기야...-_-;
이 형님은 그동안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다가
100일이나 지나서 간신히 나왔구만...
섭섭하다 씨발롬아...-_ㅠ
- 다음편에 계속 할께요-_-